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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유적 · 유물
1950년 7월 2일, 대전역에 도착하는 스미스기동부대
그런데 7월 4일 수원이 북한 인민군에 점령당한 다음 날인 7월 5일 아침, 미군의 스미스부대는 오
산 북쪽의 죽미령에서 남진하는 북한 인민군을 맞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미 지상군의 첫 전투로 기
록되고 있는 오산죽미령전투이다.
스미스부대는 완전 편성 부대 조직의 정수에 모자란 2개 소총중대, 본부중대 일부, 그리고 통신소
대로 이루어졌다. 죽미령 방어선에는 스미스부대 외에 밀러 O. 페리 중령이 지휘하는 미 제52야전
포병대대 일부 병력도 포함하여 투입되었다. 이 보병대와 포병대를 스미스 중령이 이끌고 전투에 임
했다. 스미스 중령이 이끈 죽미령전투 인원은 다음과 같다. 스미스부대의 보병장교 17명과 보병사병
389명, 합 406명. 페리 미 제52포병대의 포병장교 9명과 포병사병 125명, 합134명. 도합 스미스부대
미군 참전 수는 총 540명이었다.
전세가 어려워지자 1950년 7월 4일 한국육군본부도 수원을 포기하고 평택으로 철수한다. 평택에
있던 스미스부대도 7월 4일 밤 12시가 되어서야 오산으로 겨우 이동할 수 있었다. 죽미령은 능선이
동서로 뻗어 있으며, 능선 중앙에는 국도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어 적을 저지하기에는 천혜의 조건
이었다. 7월 5일 새벽이 되자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는 가랑비로 변하면서 비가 잦아지면서 짙은 안
개가 끼어 시계가 좋지 않은 때였다. 동트기 전 야전식량으로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적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츰 시계가 좋아지며 수원까지 보이던 시각은 스미스부대가 북한 인민군과 첫 조우한 7월 5일 오
전 7시경이었다. 8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 인민군의 제4사단 16·18연대 4,000여 명이 수원 쪽에서
스미스부대가 포진하고 있는 죽미령을 향해 진격해옴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