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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탑동·두곡동 유적(塔洞·斗谷洞 遺蹟)


                    탑동, 두곡동, 벌음동 일원의 오산 세교2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위해 기호문화재연구원에서
                  2009~2011년에 걸쳐 실시한 구제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저평한 구릉지대 및 하천변의 평야지

                  대에 해당하며, 조사 결과 청동기~근세에 이르는 유구 752기와 1336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통일신라 유구로는 집터 11기, 구덩이 3기, 돌널무덤 6기가 확인되었다. 집터는 11~16지점 중 13

                  지점에서만 확인되었는데, 지번상 탑동 산 3번지 일원이다. 낮은 구릉이 눈썹형태로 분포하였으며,
                  유구는 구릉 남사면에 위치하였는데 신라~통일신라 마을 입지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이 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3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가장천이 남동쪽으로 흐르며, 동남쪽 약 600m 정도에 위치
                  한 오산천과 합류한다. 내삼미동 유적과 마찬가지로 마을의 남쪽 곡부는 최근까지도 경작활동이 이

                  루어지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유구 일부가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집터는 총 11기가 확인되었다. 주거구조는 잔존상태가 양호하지 않아 전체의 양상을 구체적으

                  로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구들과 같이 일부 시설들이 잔존하고 있었다. 평면형태는 평면비가
                  1~1.2:1 정도의 방형으로 대부분의 집터가 이러한 형태를 보인다. 내부에는 모두 구들이 확인되었는

                  데, 구들과 아궁이가 평면‘ㅡ’자형인 11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평면 ‘ㄱ’자를 이룬다. 구들의 고
                  래는 외줄이나 두 줄인데, 5호·11호 집터의 경우 세 줄의 고래열이 확인된다. 고래열의 너비는 대체

                  로 20~25cm 정도인데 둑은 바닥면을 파낸 후 시설하였으며, 고래 상면에 흙과 돌을 이용해 마감하
                  였다. 잔존상태가 불량하여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는 배연부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1·2·5호 집터를

                  보면 집 밖으로 연기가 나갈 수 있도록 고래를 집터 밖까지 굴토한 후 장치를 시설한 흔적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신라~통일신라 집터 내 구들의 형태적 변화는 ‘ㅡ’자→‘ㄱ’자→‘T’자 순서로 변화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탑동·두곡동 유적의 경우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로 볼 수 있는 ‘ㅡ’자 형태의 구
                  들시설이 없는 점으로 보아 가수동, 가장동 등 주변에 분포하는 마을유적보다 시기가 가장 늦은 편인

                  것으로 생각된다. 집터 내에서는 대부완, 완, 시루 및 호류의 토기편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수량은 많
                  지 않다. 이 외에 소량의 기와, 방추차, 숫돌, 석제 저울추, 주조괭이, 차관 등이 출토되었다. 이 중 시

                  기를 파악할 수 있는 유물은 5호 집터에서 출토된 시루인데, 다른 개체에 비해 형태가 온전하다. 바
                  닥은 평평하고 몸체는 원통형이며 입구는 짧게 벌어진 형태이다. 바닥에는 원형의 증기공이 뚫려있

                  는데, 중앙의 증기공을 중심으로 6개의 구멍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몸체에는 띠모양 손잡이
                  가 부착되어 있고 집선문이 관찰된다. 이러한 시루의 형태는 한강 유역 출토품을 통해 보았을 때 9세

                  기 전반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함께 3호 집터에서 출토된 인화문토기는 중앙의 원을 중심으로
      오산시사
                  주변에 점을 찍어 돌린 꽃 혹은 해 모양의 문양으로 인화문이 유행하던 시기인 8세기 대의 전형적인

                  문양이다. 조사단은 집터 및 유물의 양상을 통해 8세기 경~9세기 전반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
      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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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             다음으로 돌널무덤은 13지점에 3기, 14지점에 3기가 분포하였는데, 두 지점 모두 각 2기와 1기가
                  떨어져 위치한다. 무덤은 대부분 멸실이 심한 편이어서 돌널의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벽면은

    398           긴 할석을 쌓아 조성하였고 대부분 시상대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무덤 내부에서 관정이 확인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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