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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서 헌릉 신도비(獻陵 神道碑)의 전액(篆額)을 썼다. 묘소는 원래 시흥시 군자동에 있었으나, 그
지역이 반월공업단지로 편입됨에 따라 1980년 3월 오산시 세교동 산 47-1번지 능선 상부로 이장하
였다. 묘소에는 그의 사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상석, 향로석, 망주석 등의 옛 석물이 있다. 상석
(가로 160×세로 97×높이 28cm)과 사각형의 향로석(가로 37×세로 28.5×높이 23.5cm)은 대리석
을 사용하였으며, 향로석에는 한 면에 2개의 안상문이 조각되어 있다. 망주석(높이 157×폭 39cm)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원수(圓首)에 여의두문(如意頭紋)이 조각되어 있다. 1980년 6월에 건립한
묘표에는 홍수주와 3인의 배필이 안장되어 있음을 알리고 있다. 묘표의 음기에는 홍수주의 행적이
약술되어 있다.
제3절 근·현대 유적과 유물
1. 문헌서원(文憲書院)
고려 전기의 문신(文臣)인 최충(崔冲, 984~1068년)과 아들 최유선(崔惟善, ?~1075년), 최유길(崔
惟吉, 미상)을 봉향한 서원이다.
조선 명종 7년(1550년)에 문신 주세붕(朱世鵬, 1495~1554년)이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최충
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을 모방하여 해주에 서원을 설치하였고, 이후 선조의 윤허를 받아 사액서원(賜
額書院)이 되었다. 이이(李珥, 1536~1584년)가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원장이 되어 학규(學規)를 제
정하였고, 현종14년(1673년) 관찰사 윤곡(尹谷)이 조정에 청원하여 산에서 재목을 베어 중수하였다.
철종 13년(1862년) 이유원(李裕元, 1814~1888년)에게 비문을 받아 묘정비(廟庭碑, 서원의 내력을 기
록한 비)를 건립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함에 따라 고종 8년(1871년) 훼철되었다. 그 이
후 서원의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다만 후손들이 서원지에 사당을 세워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
를 지냈다. 남북 분단 이후 남한으로 이주한 후손들에 의해 1991년 지금의 자리에 새로운 문헌서원과
영당을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건축하였고, 1992년 문헌서원건립기념비를 세웠다. 이곳은 해주최씨
대종회 본부로도 사용하고 있었으나, 세교택지개발로 인해 본부는 영등포로 이전했다. 2017년 문헌
공 최충선생 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2018년 최충 동상이 건립되어 영정각 앞쪽에 세워져
있다. 내삼미동 879번지에 위치한다.
오산시사
2. 최차흥 묘(崔次興 墓)
최차흥(1676~1732년)의 본관은 수성인(隨城人)으로 최정린(崔廷麟, 1760~1799)의 증조부이다.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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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는 현재 두곡동 산 25번지(고생재)에 위치하는데, 최정린 효자 정려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우
측 아래, 지상에서 보았을 때 북서쪽으로 약 40m 정도 떨어져 있다. 상석은 가로 133×세로 84.5×
444 높이 41cm 정도의 규모이며, ‘수성최공차흥지묘 배영암박씨쌍봉(隋城崔公次興之墓 配靈岩朴氏雙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