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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세교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건물이 철거될 예정이다.






                  청군 신북청읍 안곡리에 있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441
                    사당은 가수동 85-2번지에 있다. 본래 누읍동에 위치하였으나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고, 후손들                                         역사

                  이 현재의 위치에 다시 건축하여 제향을 올리고 있었다. 사당 내부에는 총 5점의 치제문(致祭文)이                                           /  유적
                  보관되어 있는데, 정조 14년(1790년), 정조 19년(1795년), 순조 4년(1804년), 순조 10년(1810년), 순조

                  12년(1812년에) 각각 지방관을 보내 치제한 제문이다. 현재는 세교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건물이 철                                        · 유물
                  거될 예정이다.



                  45. 청학동 유적(靑鶴洞 遺蹟)


                    겨레문화유산연구원이 2009~2011년에 걸쳐 실시한 청학동 서쪽 일원의 오산 세교2 택지개발사업
                  부지에 대한 구제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감투봉(해발 93.5m)에서 북동쪽으로 뻗은 가지능선
                  과 북동사면에 해당하며, 현재는 개발을 위해 모두 삭평되었다. 조사 결과 청동기~조선시대에 이르

                  는 유구 453기와 808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 유구는 3개 지점에 걸쳐 분포하는데, 집터 23기, 건물지 2기, 토실 11기, 구덩이 34기, 소
                  성유구 9기, 움무덤 184기, 회무덤 29기 등이 확인되었다. 분묘는 6지점에 159기가 집중적으로 분포
                  하는데, 1단·2단 굴광의 움무덤이 모두 확인되었으며, 대부분의 무덤에서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

                  았으나 백자 잔·발·접시, 청동숟가락 등 유물이 부장된 무덤도 일부 있다. 39호 무덤이 분청자가

                  출토된 집터를 파괴하고 들어선 점으로 볼 때 감투봉 북동쪽 능선에 조선전기부터 지속적으로 묘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8지점의 지상건물지에서는 철솥이 출토되었으며, 9지점의 5호 토광묘에서
                  는 청동 합·숟가락, 철제가위, 합죽선 편이 출토되었다. 9지점에서는 집터 11기가 확인되었는데, 규

                  모는 장축 3~5m 정도로 균일하고 11호 집터만 약 8m 정도로 큰 편이다. 내부에는 모두 구들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출토된 유물은 적은 편이나 백자 및 기와류의 형태적 특징으로 보았을 때 16~17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46. 청호동 유적(淸湖洞 遺蹟) ①


                    경기대학교박물관이 2005년에 실시한 청호동 37-3번지 일원의 LG자이 아파트 개발사업부지에

                  대한 구제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이다. 오산천과 동쪽 평택시 청룡봉(해발 140m)의 중간에 위
                  치한 구릉 말단부 평지에 해당하며, 조사 결과 조선시대 집터 1기가 확인되었다.

                    집터는 절반 정도 멸실된 상태였으며, 잔존 길이는 동-서 2.9m, 남-북 3.2m, 깊이는 약 0.2m 정
                  도이다. 아궁이는 집터의 남쪽 방향에 위치하였으며, 고래는 북쪽 방향에 위치하였다. 고래의 둑은

                  돌과 흙을 이용해서 조성하였는데, 잔존 양상이 양호하지 못해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내부에서
                  손잡이가 달린 동이가 출토되었는데, 형태상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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