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3 - 제2권
P. 443
집터는 전 지역에서 확인되나 12·13·14지점에 밀집하여 분포하였는데, 대부분 구릉 남사면에 위 443
치하고 있었다. 주거 형태는 방형, 원형, ‘日’자형 등 다양하며, 내부에서는 부뚜막과 구들, 선반, 저 역사
장구덩이, 나무기둥구멍 등이 확인되었다. 난방시설은 한쪽 벽에 짧은 아궁이와 구들을 설치한 것과 / 유적
한 열의 고래를 가진 구들, ‘日’자형 전면에 여러 열의 고래를 시설한 구들 등 다양하다. 이러한 양상
은 집에 살았던 사람의 신분이나 재력, 사회적 위치 등에 따라 다른 것으로 보인다. 야외화덕은 38기 · 유물
가 확인되었는데, 주거 내부에서 취사가 불가능하거나 공동취사의 성격으로 추정된다. 구덩이는 317
기 정도로 굉장히 많은 편이며, 대부분 주거 공간과 떨어져서 위치하였다. 특히 계단식의 출입시설이
확인된 수혈이 발견되어 토실과 같은 저장시설로 보인다. 유물은 백자가 전체의 약 70% 정도를 차지
할 정도로 다량 출토되었는데, 형태 및 문양 등의 속성을 통해 보았을 때 15~18세기에 이른다. 이를
단계적으로 구분할 경우 고려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임란 이후인 17~19세기
정도로 볼 수 있으나 크게 보아 고려시대 후기 이후 지속적으로 사람이 살면서 마을을 영위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유적에서 확인된 움무덤과 회무덤 또한 마을의 존속시기와 동일하며, 조선 말기에 이
르러 점차 마을이 사라지고 묘역으로 변모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50. 해평윤씨 묘역(海平尹氏 墓域)
외삼미동 산 40-3번지 북사면에 위치한 해평 윤씨 한성서윤공파의 묘역으로, 윤기반(尹起磻) 이후
19대에 걸친 약 45기의 묘가 있다. 윤기반은 단종 원년(1453년)에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같
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세조의 즉위에 협력하여 원종공신 2등(原從功臣 二等)에 녹훈(錄勳)되
었고, 그 이후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윤기반의 증손인 윤응상(尹應祥)이 외삼미동 삼미곡에 터를 잡은 이후 지금까지 후손들이 이곳에
세거하게 되었다. 1931년 실전(失傳)되었던 윤기반의 묘가 과천에서 발견되었고, 1971년에 현재의 위
치로 이장되었다. 2001년 외삼미동 각지에 흩어져 있던 묘소를 이장하여 이곳에 묘역을 새롭게 정비
하였다. 정비 과정에서 석물을 임의로 배치하여 문인석과 상석, 향로석, 망주석 등의 석물은 원래 주
인을 알 수가 없는 상태이다. 묘역은 총 5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단의 좌·우측 끝에는 문인석,
망주석 등의 옛 석물을 배치하였다. 가장 위층에는 윤기반, 윤응상 등의 묘가 있으며, 문인석, 망주석
한 쌍이 있다. 4층에는 문인석, 망주석 한 쌍, 3층과 2층에는 문인석 한 쌍이 있고, 1층에는 문인석 두
쌍과 동자석 한 쌍의 옛 석물이 있다.
묘역 입구에는 2004년 건립한 윤기반 신도비가 있으며, 묘역 좌측 아래에는 옛 석물들을 한곳에
모아두었다. 문인석 2기, 상석 4기, 윤말형(尹末衡), 윤필주(尹弼周) 등의 묘표 약 8기가 있으며, 비문
의 마모가 심하여 피장자를 알 수 없는 방부하엽형의 묘표 2기도 확인되었다.
51. 홍수주 묘(洪受疇 墓)
홍수주(1642~1704년)는 남양인(南陽人)으로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홍처윤(洪處尹,
1607~1663년)이다. 사대부 서화가(書畵家)로서 매·대나무·포도를 잘 그렸으며, 전서(篆書)에도 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