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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에서 파손된 철제품들이 출토되었는데, 인접한 4호 집터에서 철과 관련된 작업을 했다고 추정
할 수도 있으나 정황상 금전적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함일 가능성이 높다. 이 외에 움무덤과 집석유
구, 소성유구도 확인되었으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명확한 시기를 알기 어려우며, 2기의 도랑에서
분청자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집터와 동시기로 보인다.
마을이 만들어진 시점은 내부에서 출토된 분청자, 백자류를 통해 보았을 때 15~16세기로 추정되
며, 집터 내부에서 검출된 목탄시료에 대한 방사성 탄소연대측정값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36. 원동 유적(園洞 遺蹟)
서경문화재연구원이 2016년에 실시한 원동 역말저수지 북편 일원의 아파트 개발사업부지에 대한
구제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지금은 오산 원동 한양수자인아파트가 들어서 있으며, 지번상 원
동 907번지이다. 마등산(해발 145m)에서 서쪽으로 뻗은 가지능선의 말단부에 해당한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 집터 13기, 구덩이 16기, 소성유구 4기, 나무기둥군 2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집터 13기 중 3기는 기둥구멍만 확인되었는데, 문헌 등을 통해 보았을 때 빈민의 거주공간으로 파
악되고 있다. 즉 가운데 기둥을 설치한 후 이를 중심으로 거적이나 직물 따위로 사방을 둘러 벽을 만
들고, 문은 없고 취사를 밖에서 취사를 하는 형태이다. 나머지 10기에서는 온돌시설과 아궁이가 확인
되었는데, ‘日’자형으로 분리된 공간 중 상단부에 온돌시설이 배치되고 하단부에 아궁이 및 주방이 위
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은 총 99점인데, 도기와 자기류가 대다수이다. 분청자도 2점 확
인되나 대다수의 백자는 오목굽 또는 수직굽에 굵은 모래받침을 사용한 점, 일부 철화가 시문된 백자
를 통해 보았을 때 중심시기는 17~18세기로 판단된다.
37. 이상재 묘(李尙載 墓)
이상재(1607~1636년)는 부평인(富平人)으로 자는 문거(文擧)이다. 인조 8년(1630년)에 사마시(司
馬試)에 합격하였고, 인조 11년(1633년)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저작(著作)에 임용되
었다. 1636년 금정도 찰방(金井道 察訪)으로 재직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도관찰사 정세규
(鄭世規)의 종사관으로 근왕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던 중 용인에서 적의 협공으로 순절
(殉節)하였으며, 이후 교리에 추증되었다. 숙종 33년(1707년)에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영조 17년
(1741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추가 증직(贈職)되었다.
묘소는 정려문이 있는 구릉의 반대편에 위치하며, 현재 서동 산 66-1번지 일원에 해당하는 위치
오산시사
의 남서사면에 있다. 상석(가로 133×세로 83.5×높이 39.5cm), 향로석(가로 33×세로 25.5×높이
52cm), 혼유석(가로 72×세로 30cm), 망주석 한 쌍(높이 36×폭 36cm) 등의 석물과 1977년에 세운
제 묘표, 1996년에 세운 시비(詩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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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이상재 충신 정려문(李尙載 忠臣 旌閭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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