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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의 조선시대 마을이 확인되었는데, 보통 10기 내외의 집터가 군집을 이루며 산의 능선마다
분포하는 양상이다. 집터 79기, 구덩이 39기, 소성유구 40기, 건물지 4기, 기와가마 1기, 도랑 1기 등
의 유구와 함께 움무덤 84기, 회무덤 14기가 조사되었다.
집터의 경우 대부분 취사·난방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삭평으로 인해 아무런 시설이 확인되지 않는
유구도 있다. 구들시설의 경우 집터 한쪽에 짧게 마련한 것과 ‘日’자 형태로 구획한 후 한쪽 부분에 구
들을 마련한 것, 전면에 마련한 것 등이 확인된다. 더불어 구들시설 없이 집터 한쪽 면에 아궁이만 시
설한 것도 확인된다.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분청자 발·접시·종지 등과 함께 백자류가 출토되었
는데, 분청자만 단독으로 출토된 경우가 22기로 가장 많고, 백자와 함께 출토된 것은 4기, 백자만 출
토된 것은 7기이다. 백자는 대부분 접시·발 종류로 생활용기로 판단된다. 이러한 양상을 통해 보았
을 때 지곶동 마을은 15~16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여계산 주능선의 상부에 15세기 중
반경 마을이 들어선 이후 점차 능선 하단부인 북동쪽으로 마을이 이동하여 16세기경에는 능선의 낮
은 곳에 입지한 것으로 보인다.
움무덤은 능선 상부인 1지점과 하부의 3지점에서 대부분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묘를 판 후 관을 안
치하고 벽과 관 사이를 채운 형태이다.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 보았을 때 15~1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에 회무덤과 이단으로 굴착한 움무덤이 등장한다. 회무덤 또한 조선 전기양식인 회격
묘(灰隔墓)가 없다는 점을 통해 보았을 때 지곶동의 무덤군은 15~16세기경 조성된 이후 오랜 기간 묘
역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43. 지곶동 유적(紙串洞 遺蹟) ②
서해문화재연구원이 2015년에 실시한 지곶동 577번지 일원의 아파트 개발사업부지에 대한 구제발
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으며, 현재 e-편한세상 오산세교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필봉산(해발 118m)
에서 북동쪽으로 뻗은 가지능선에 해당한다. 조사 결과 통일신라~조선시대에 이르는 유구 111기와
85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 유구는 움무덤 25기와 회무덤 20기이다. 움무덤의 경우 출토유물이 상당히 소량인 편인
데, 4기의 무덤에서 7점이 전부이다. 그중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백자 접시 및 청동 합·숟가락 등인
데,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통해 보았을 때 대략 16세기경으로 추정되며, 이후 부장품이 줄어드는 경향으
로 보아 지곶동 유적은 16세기에 처음 묘가 조성된 후 후대에 이르기까지 묘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
다. 회무덤은 단 1기에서 백자 뚜껑 한 점이 출토되었는데, 조성 시점은 움무덤의 양상과 동일하다.
오산시사
44. 청해백 사당(靑海伯 祠堂)
제 조선 개국공신인 이지란(李之蘭, 1331~1402)의 사당이다. 이지란의 본성은 퉁(佟), 본명은 쿠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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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이며, 아버지는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이다. 부인
은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姜氏)의 조카딸인 혜안택주 윤씨(惠安宅主 尹氏)이다. 1392년 명나라를
440 도와 여진족을 정벌한 공으로 청해백에 봉해졌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묘소는 함경남도 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