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5 - 제2권
P. 435

병점리로 이전하였고, 이후 2002년 지곶동 산 46번지 일원의 공원묘지로 이전되었다. 묘소에는 1579                                     435
                  년에 건립된 방부하엽형의 묘표(높이 124cm)가 남아있다. 마모가 심한 상태로 전면에는 ‘○○경주김                                        역사

                  씨지묘(慶州金氏之墓), ○○○현신교위안공지묘(顯信校尉安公之墓)’라 각자되어 있다.                                                    /  유적
                    족보 기록에는 안자우가 별제(別提)의 관직을 지냈으며, 부인은 숙인 하동 정씨(淑人河東鄭氏)라고

                  기록하고 있다. 안자우의 관직과 부인 관련 기록이 일치하지 않아 이 묘소의 피장자를 안자우로 보는                                          · 유물
                  것은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28. 안후 묘(安煦 墓)


                    안후(생몰년 미상)는 안훈의 손자로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지냈다. 묘는 서울시 흑석동에 있었는
                  데, 1975년 화성군 태안면 병점리로 이전하였고, 이후 2002년 지곶동 산 46번지 일원의 공원묘지로
                  이전되었다. 묘소에는 옛 석물로 방부하엽의 묘표(높이 98cm)가 남아 있다. 묘표 중앙부에 ‘○○○○

                  ○○氏之墓’라 새겨져 있어 안후 본인의 묘표라기보다는 부인인 숙부인 연안 송씨(淑夫人 延安宋氏)

                  의 묘표로 추정된다.


                  29. 안훈 묘(安訓 墓)


                    안훈(1420~1470년)은 조선 개국공신 안경공(安景恭, 1347~1421년)의 증손이다. 혁혁한 공신 가문
                  의 후손으로서 그 자신은 세조에 협력하여 다시 공신이 된 대표적인 훈구파 관료이다. 묘는 원래 서

                  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었으나, 개발로 인하여 1969년 화성군 태안면 병점리로 이장되었고, 이후 해
                  당 지역이 동탄지구 개발계획으로 인해 대규모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2002년 지곶동 산 46번지 일원

                  의 공원묘지로 이전되었다.
                    묘소에는 상석과 묘표, 망주석 한 쌍, 문인석 한 쌍 등 옛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묘표는 방부하

                  엽형으로 1500년에 건립되었다. 묘표에는 ‘유명조선국절충장군행의흥대도호군안공묘지(有明朝鮮國
                  折衷將軍行義興大都護軍安公墓誌)’라 하여 묘지문(墓誌文)을 새긴 특이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망

                  주석은 원수(圓首)와 세부 장식이 화려하다. 문인석은 복두공복(幞頭公服)형으로 몸체가 둔중하지만
                  눈의 윤곽선과 양쪽으로 늘어진 수염이 강조되어 있다. 15세기 말~16세기 초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

                  여주는 석물로 성종~연산군 대를 대표하는 우수한 석물이다.


                  30. 양산동 유적(陽山洞 遺蹟)


                    양산동 산 19-57번지(당시 양산동 산 19-3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한신대학교 박물관에서 1998
                  년 전반에 실시한 아파트 개발사업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이다. 독산(禿山 혹은

                  禿城山, 해발 208m)과 양산봉(해발 180.8m)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서사면 말단부에 해당하며, 오
                  랜 기간 경작지로 활용되고 있다. 조사 결과 삼국~조선시대에 이르는 유구 8기와 569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430   431   432   433   434   435   436   437   438   439   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