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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m, 퇴칸 1~1.5m 이다. 초석, 적심,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1-나 건물지는 주칸 3.6m 정도
                  의 간격을 보이며, 후대 집터가 들어서면서 파괴되었다. 두 동이 인접하여 조성된 이유는 알 수 없으

                  나, 분청자 및 백자류 등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15세기에 사용되다가 폐기된 이후 16세기 이른 시기
                  에 집터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6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확인된 구들

                  유구는 출토유물의 양상이 건물지와 같으므로 동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움무덤은 유물이 출
                  토되지 않았고, 삭평이 심해 정확한 양상은 알 수 없다.



                  20. 세교동 산 41-5번지 유적(細橋洞 山 41-5番地 遺蹟)


                    세종문화재연구원이 2013~2014년에 실시한 세교동 산 41-5번지 일원의 오산시 대로 2-13호선
                  개설공사부지에 대한 구제발굴조사에서 확인되었으며, 현재 주소는 지곶동 산 74-3번지 일원이다.
                  독산(禿山, 해발 208m)과 양산봉(陽山峰, 해발 180.8m)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동쪽으로 길게 뻗은

                  가지능선의 말단부에 해당한다. 조사 결과 삼국~조선시대에 이르는 유구 88기와 267점의 유물이 출

                  토되었다.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조사하였는데, 모두 조선시대 유구가 분포하였다. 움무덤 57기, 구덩이
                  17기, 노지(爐址, 불을 땐 자리) 3기, 도랑 8기 등이 확인되었다. 무덤은 대부분 1단으로 굴광한 후 관

                  과 벽 사이에 흙을 다진 형태가 대부분인데, 일부 무덤은 벽감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분청자

                  발·접시·호, 백자 발·접시, 청동숟가락·젓가락·합, 관정, 관옥, 조선통보 등이 출토되었는데,
                  무덤의 형태와 유물 등을 보았을 때 15~16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2단으로 굴
                  광한 무덤이 수 기 존재하는데, 대규모 묘역이 조성된 이후 조선 후기 어느 시점에 만들어졌을 것으

                  로 추정된다.


                  21. 세람교지(細藍橋址)


                    세람교지는 오산-화성간 고속도로 건설계획에 따른 안녕IC구간 교량공사 중 건축물의 일부로 여

                  겨지는 석재가 노출되어 발견된 유적이다. 공사 당시 담당자의 연락을 받은 한신대학교 박물관에서
                  문화재청에 발견신고를 하였고, 이후 2006년 4월 15일부터 5월 9일까지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황구지천 안녕리 방면 고수부지 하부에서 교대지가 확인되었으며, 황구지천 바닥에서 교

                  량에 사용되었던 석재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 석재들은 현재 한신대학교 교정으로 이전되었다. 더
      오산시사
                  불어 바닥에 다리의 지반 침하를 방지하기 위해 잡석을 여러 겹 다져 쌓은 시설과 함께 나무기둥을

                  박아 고정시킨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세람교의 바닥 기초시설로 추정된다. 교량 북편의 교대지는 하

      제           천의 고수부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유실된 것으로 보이는데, 장대석 6매가 정연하게 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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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           있었다.
                    이러한 발굴조사 내용을 통해 조선시대 고지도에 기록된 세람교였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마

    432           을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1970년대까지 백사장 부근에 부분적으로 잔존하였으나, 새마을사업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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