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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변응성 선정비(邊應星 善政碑) 429
역사
변응성(1552~1616년)은 원주인(原州人)으로 자는 기중(機仲)이며, 공조판서 겸 도총관 변협(邊協,
1528~1590년)의 아들이다. 선조 12년(1579년) 무과에 급제한 이후 임진왜란(1592년) 때 경주부윤으 / 유적
로 임명되었으나, 왜군이 경주를 점령하여 부임하지 못하였다. 이후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 유물
천거로 경기방어사가 되어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선조 35년(1602년) 임진왜란이 끝난
후 독산성(禿山城)을 석성(石城)으로 수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광해군 대에는 훈련도감 대장, 한성
부 좌윤(左尹)까지 승진하였다.
선정비는 화강암 재질로 된 방부원수(方趺圓首)형이며, 폭 62cm, 두께 22cm, 높이 143cm이다. 전
면에 ‘방어사변응성선정비(防禦使邊應星善政碑)’라 각자(刻字)되어 있고, 건립연도 등은 기록하지 않
았다. 선정비는 독산성 밖 서쪽 주차장에 입구 근처에 있었으나, 독산성 보수 공사 때 주민들에 의하
여 현재의 위치인 지곶동 242번지로 옮겨졌다.
15. 보적사(寶積寺)
사적 제140호인 독산성 동문에 위치한 사찰로 지곶동 150번지 일원에 해당하며, 1988년 7월 27일
전통 사찰 제34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보적사라는 명칭은 『화성지(華城志, 1831)』에 처음으로 기록되었고, 옛 명칭이 세마사(洗馬寺)로 알
려져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독산성 성내에 거주하였던 승도의 규모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남아있는 건물의 규모로 보아 10여 명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승도들은 1790년 용
주사 창건 이후 용주사 총섭의 절제를 받는 승군으로서 1797년부터는 용주사 승도와 같이 15년 이상
거접(居接)하면 첩가(帖加)되는 혜택이 주어졌다. 또한 조선 후기 독산성 내외에는 약 250~300여 호
의 민가가 거주했다고 하는데, 보적사는 이 백성들의 신앙과 민생의 안정을 보살피면서 동시에 승군
으로서 산성의 관리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적사는 창건 당시 세계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화소멸,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 하고, 부
처의 행을 닦아 무상보리의 진리를 터득케 한다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중심으로 독산성의 역
사와 지역민들과 함께 오랜 세월을 같이 했다. 일례로 춘궁기에 얼마 남지 않은 쌀을 부처님께 공양
하고 집에 돌아가니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는 전설은 보적사의 명칭과 관련된 일화로 생각되지
만, 동시에 독산성 및 주변지역 사람들의 신앙의 중심지가 보적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야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적사 혹은 세마사는 임진왜란 이후 창건되어 오산지역 불교의 중심지
였으며, 1899년에 편찬된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에 보적사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영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산성마을 소개(疏開)령에 따라 성안마을을 파괴
하고 주민을 각처로 분산, 이주하게 하면서 보적사의 사세는 기울어갔다.
1987년 도광정운(道光正云) 스님의 불사 때 석가여래불을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창정전이
건립되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좌상, 지장보살좌상, 약사여래상과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