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2 - 제2권
P. 512
이 기록을 보면 남문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지만, 과거에 이름이 없던 것을 1831년(순조31) 순조에
의해서 이름을 갖게 된 것을 알 수 있는데, 『華城志』가 1831년에 편찬되었고 『水原郡邑誌』가 1899년에
편찬된 것으로 볼 때 『水原郡邑誌』에 기록된 남문의 이름은 순조가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즉, 남문은
1831년 이후에나 진남문으로 불리게 된 것이고 그 이전에는 별도의 이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진
남루는 1599년에 변응성에 의해 건립되고 이때부터 진남루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이는 순조에 의해
1831년 진남문으로 이름 지어진 남문보다 200년이나 이른 것이다. 따라서 후대에 지어진 남문의 이
름을 근거로 하여 진남루를 남문의 문루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오히려 진남루가 남
문의 문루가 아니라 순조가 남문의 이름을 정할 때 예전부터 성의 남쪽에 있던 진남루의 명칭을 따서
남문의 이름으로 지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진남루를 남문의 문루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독산성이 기록된 문
헌뿐만 아니라 진남루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된 문헌들에서도 진남루가 남문의 문루로 기록된 것은
단 한 건도 없다. 그리고 『華城志』와 『水原郡邑誌』에서는 남문의 기록은 城堞條에 포함되어 있고, 진
남루는 鎭南樓條에 별도로 기록하고 있고 심지어 『水原府邑誌』에는 樓亭條에 기록하는 등 구분하고
있어 진남루를 남문의 부속건물이 아닌 별도의 건물로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진남루의 위치에 대해서는 남문의 문루가 아닌 ‘운주당의 남쪽’ 또는 ‘성의 남쪽 모퉁이 절
벽’으로 기록되어 있고 용도에 있어서도 독산성을 방문하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日省錄』에 기록된 남문루의 규모를 보면 진남루가 남문루와 서로 다른 건물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日省錄』 正祖 12)
정조16년 10월 3일
…(전략)…남장대 6칸은 안쪽 3자를 이건하여 단청을 고쳤습니다. 남문루 8칸은 들보 위에 회를 바
르고 문의 확쇠 1개를 새로 개비하였습니다. 서문루 8칸은 보수하고 기와를 덮었습니다.…(후략)…
이 기록을 보면 남문루의 규모는 8칸으로 6칸 규모인 진남루(『華城志』 ①, 『水原郡邑誌』 ①)와 규모
13)
에서 명확한 차이가 확인되는데, 조선시대 독산성의 보수기록 중 문루가 확장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서로 다른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6칸에 단청을 칠한 남장대라는 건물에 대
해서는 『華城志』와 『水原郡邑誌』에 기록된 독산성 내 건물 중 6칸 규모에 단청을 칠한 건물은 진남루
오산시사 가 유일하다. 또한, 진남루가 『日省錄』의 기록 2년 전인 1790년(정조14)에 보수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日省錄』에 기록된 남장대는 진남루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제
2
권
12) 『日省錄』 正祖
정조16년 10월 3일
…(전략)…南將臺 六間 向內三尺移建 改丹靑 南門樓 八間 樑上塗灰 門確金一箇新備 西門樓 八間 修補蓋瓦…(후략)…
512 13) 독산성의 보수에 관한 기록은 주4의 이용범 논문에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