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전시가이드 2025년 11월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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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정의 전시포커스
시계를 그리는 마음의 항해자
윤진석 작가
글 :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내머릿속에 시계들, 73x117cm, 캔버스에 아크릴, 2025, 3개 연작시리즈
윤진석 작가는 시계를 중심으로 기억과 감각, 그리고 정서적 풍경을 구축해 나 (Hands of Time)』에서 “인간은 시간을 재기 시작하면서 더 깊은 고독 속으로
간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그는 시계를 반복적으로 그리지만, 그것은 단순한 물 들어갔다”고 지적한다. 작가는 이러한 도구적 시간 개념과 철저히 거리를 두
리적 오브제의 재현이 아니다. 작가에게 시계는 시간을 재는 기계가 아니라, 며, 시간을 물리적으로 쪼개어 다루지 않는다. 그는 “나는 시간을 잰 적이 없
시간을 느끼고 사유하게 만드는 장치이며 마음을 투영하는 상징적 기호다. 어 어요. 그냥 가만히 듣는 거죠. 가슴이 어떻게 뛰나, 그걸 보려고요.”라고 담담
린 시절 잠시 머물렀던 공간에서 바라본 시계들을 작가는 지속적으로 기억해 히 말한다. 그에게 시간은 단위로 분할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박동
내고, 그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빛과 공기, 불분명하지만 강렬하게 각인된 처럼 살아 있는 감각의 흐름이며, 그래서 그의 시계는 얼어붙은 듯 보이면서
심리적 떨림을 화면 위로 반복해서 불러온다. 이러한 반복은 결코 강박이 아 도 작가의 내면에서 고요히 진동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프랑스 철학자 앙
니다. 오히려 그는 “나는 똑같이 그리고 싶어서 그리는 게 아니에요. 다시 그려 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이야기한 ‘지속(durée)’과 긴밀히 닿아 있다.
도 조금씩 달라져요. 그게 좋아요.”라고 말하며, 동일한 형상 속에서 조금씩 달 베르그송에게 시간은 쪼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이 축적되며 유
라지는 감각의 변주를 기꺼이 즐긴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흐름이 결코 동일하 기적으로 흘러가는 생의 흐름이었다. 작가는 색과 선을 통해 이 흐름을 화면
지 않듯, 같은 시계를 그려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미묘한 차이를 작가가 스스 에 남기며, 살아 있는 시간(living time)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그의 작품 앞
로 기꺼이 수용한다는 뜻이다. 에 서면 이미 지나간 줄 알았던 시간이 다시 살갗 아래로 스며드는 듯한 미묘
한 떨림을 경험하게 된다.
시간의 흐름을 감각으로 바꾼 예술적 전환
작가의 시계는 흔히 신경다양성 예술가에게 기대되는 즉흥적 폭발이나 감정
윤진석 작가의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거나 재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 의 무정형적 방출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놀라울 정도로
려 그것은 시간을 잘게 나누는 대신 감각과 정서로 전환하기 위한 하나의 예 치밀하게 구조화하고, 기억을 반복과 규칙 속에서 층층이 조직한다. 시계 속
술적 장치다. 철학자 레베카 스트러더스(Rebecca Struthers)는 『시계의 시간 규칙과 반복은 작가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감각을 외화하기 위한 심리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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