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 - Choi wungsub Success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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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은 ‘최바라기’의 말을 믿고 따라주었다. 성경과 함께 하는 모임이 지속되자 예배에
참가하는 교사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여섯 명이 모여 컴퓨터학원에서
가정예배 형식으로 성경공부와 주일예배를 드렸다. 성향도, 가정 형편도 모두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지만, 컴퓨터와 영어와 한국어 공부를 통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어찌나
감사하고 기쁜지! 그들 모두 내 삶의 전부로 여겨졌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무슬림의 나라에서
드디어 무슬림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의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감동이고 행복이었다.
감동은 그들을 향해 내가 정성을 쏟아 붓는 것으로 이어졌다. 성경공부, 예배, 가정방문 등을
통해 그들의 부모들과도 교제를 나누었고, 집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다 주었으며, 한국 교회에
요청하여 수많은 의복과 가정 살림살이들도 챙겨다 주었다. 가려운 부분은 긁어주고 부족한
부분은 내가 할 수 있는 선 만큼 채워주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살펴 주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나의 협조를 어떻게든지 복음과 연결시키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점점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들이 내가 둘러놓고 있던 복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뛰어난 전공분야 하나 없이 평범한 목사 선교사로 선교지에 들어갔는데, 컴퓨터학원을 하다
보니까 어느새 한국의 여러 선교단체들에 ‘최웅섭은 전문인 선교사’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이슬람지역에서 컴퓨터학원을 통해 설립된 최초의 교회모임이 되다 보니까 컴퓨터를 통해
사역하는 여러 단체에서 관심을 보이면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당시 내가 세운 컴퓨터학원에서
예배모임이 만들어지자 이슬람지역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이 모범사례로서 간증을 원했다. 나 역시
직장을 통한 교회 설립 사례들을 컴퓨터를 통해서 사역하는 여러 단체에 발표하게 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기관이 FMNC 와 SWIM 선교회였다. 이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지면서
컴퓨터학원을 통한 교회개척 사례를 한국교회에 소개하기 시작하였고, 이 방법이 이슬람
지역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모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방법도 얼마 가지 않아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학원 설립과 더불어 세무서의 끈질긴
방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컴퓨터학원은 문을 닫게 되는데, 이 이야기는
뒤에 자세히 하기로 하자.
기쁨과 힘겨움의
양날
이슬람국가의 크리스천들
크리스천으로 변모하는 무슬림들을 바라보는 것은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물질도 체력도
점점 고갈되어 갔지만, 삶의 기쁨은 또 다른 에너지의 원천이기에 낙심 않고 일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믿음의 가족들이 된 이후부터,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보다 그들의 삶의
요구가 많아지고 커지는 속도가 더 빠른 경우도 많았다. 또한, 그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그치는
경우도 많았다. 아마도 구소련의 영향력 속에서 공짜로 배급받고 살아온 습성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눈에 빤히 보이면서도,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믿음이 성장하겠지,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지겠지, 라는 믿음만으로 버티곤 했다.
하루는 학원 교사로 일하는 자매의 이모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을 갔다. 속히 낫기를
기도하고 위로하며 돌아설 때 러시아어 성경을 손에 쥐어주고 왔다.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