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 - 부안이야기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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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한다. 1)
조선시대에는 고성산 밑에 역이 생겼으니 부흥역
(扶興驛)이다. 이 역은 김제의 내재역으로 이어지고 정
읍 영원역과도 역로를 통해 연결되며 고부까지 이어
진다. 이 부흥역을 신역(新驛)이라고도 했다. 그렇다
2)
면 구역(舊驛)도 있었다는 것인데, 부안읍 동중리의
구영말(구역, 舊驛)을 가리킨다. 그래서 송정마을이
부령현의 치소였을 때는 부안읍의 구역말에 역이 있
었다고 보아야 한다. 태종 때 부령현과 보안현이 합쳐
지고 치소가 성황산 밑으로 옮겨가면서 이곳 부령현
의 치소 자리에 부흥역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곳은 속칭 역말이라 불렀으며 서두(西道)라고도
했다. 서도방의 중심마을이란 뜻이다. 갑오동학농민
전쟁 시에는 송정마을에 있는 신씨 재실인 신원재(愼
遠齋)를 동학농민군이 도소로 이용했다. 1914년에 행
안면이 생기면서 면사무소와 지서가 처음에는 송정
마을에 있었다.
고성산의 서쪽 면에 마동 마을이 있다. 이곳 출신 김
고성산성의 성터길 청(金淸)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에 오른 사
람이다. 김청은 은퇴하여 우반동 골짜기에 정사암(靜
思菴)을 짓고 말년에 풍류를 즐기며 조용히 지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은 이곳에 와서 잠시 머물
야 할 것이다. 간척으로 갯벌을 막아 형성된 마을이기 며 자신의 글들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허균은 자신이
때문이다. 정자를 개수하여 머물게 된 경위를 밝힌 「중수 정사암
기」를 남겼다.
마동 마을의 북쪽에는 사치산(巳稚山)으로 불렸던
고성산성과 부흥역 사산(士山)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현재 임병선이 선
조가 살던 집을 지키고 문서를 간직하며 살고 있다. 그
고려 때는 부령현(扶寧縣)의 치소가 행안면 역리의 의 선조 임우춘(林遇春)은 무과에 합격하여 공주진우
송정 마을에 있었다. 이곳이 현의 중심지였으며 그 읍 영장과 사천현감, 초계군수 등을 역임했다. 임우춘의
성은 고성산(古城山)에 있었고 지금도 토성(土城)의 문서들을 살펴보면서 이런 자료들이 쉬운 우리말로
자취가 남아 있다. 이곳을 읍지에서는 고읍성(古邑城) 변역이 된다면 지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
이라 하며 둘레가 1,500자, 성 안에는 샘이 6개가 있었 각이 들었다.
1)『대동지지』 1862, 『부안군역사문헌자료집』 2000, 356쪽. 2)『세종실록 지리지』 1454, 『부안군역사문헌자료집』 2000,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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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1_행안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