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 - 부안이야기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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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안에서 대벌리로 이어지는 장뚝, 지금은 도로가 되었다.





            작로 개수를 시작하자 천수답(天水沓)은 못자리도 못                      나서야했다. 농사짓기에도 빠듯한 군민들이 노력봉사

            하고 모내기도 할 수 없었다. 행안면민 수백 명은 군수                    에도 동원된 것이다.
            에게 책임을 물어 군수를 태워죽이겠다고 그 집까지                         ‘부안군 도로 경진회’라 하여 도로관리에도 경진회
            몰려가서 큰 소동을 벌였다. 일개 등외도로를 하나 만                     라는 이름으로 경쟁을 부추겼다. 모든 것을 경쟁으로
                                                                                         8)
            들기 위해서 면민이 먹고사는 양식을 생산하는 큰 들                      몰아넣고 상은 달랑 표창장이라는 종이 한 장이다. 도

            을 허수히 조처한 것은 당연히 군수가 책임질 일이니                      에서는 신작로 관리에 각 군을 경쟁시켰다. 1937년도
            자결이라도 해야 할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7)           에 부안군은 도 주최 도로 경진대회에서 1등을 했다.
              신작로가 개설되었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신작                     이듬해에도 1등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1등을 못한
            로가 만들어지면 관리(유지, 보수)는 신작로가 지나는                     다른 지역은 1등을 하기 위해 피나는 경쟁을 벌였다.

            지역 주민들에게 맡겨졌다. 특히 비포장도로였기 때                       부안군은 농사철이 시작되는 4, 5월부터 군 주최 도로
            문에 평소에도 자갈(사리부역)을 넣어 도로를 다져서                      경진회를 조직하고 각 면은 다투어 도로수선을 했다.
            관리하고 홍수로 도로가 유실되면 주민들이 복구에                        평가를 거쳐 9월 30일에는 부안경찰서 연무장에서 관



            7)「동아일보」 1924. 10. 17. 8)「매일신보」 1938. 10. 8.




        018   부안이야기·2018년/겨울/통권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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