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부안이야기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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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되어 있었다.
신문 기사를 보면 부안군 한해(旱害) 피
해는 1932년, 1935년, 1936년에 극심했
다. 1932년 7월 20일 현재 조사에 의하면
한해 답은 2,682정 3반 중 전혀 아무것도
심지 못한 면적은 684정 6반, 대용작물을
심은 면적은 1,997정 7반, 이재농가 호수
는 4,119호로 조사되었다. 15) 그러나 식민
당국은 구제책조차 세우지 못한 상황이었
다. 한해 피해는 동진면, 행안면, 상서면이
극심했다.
1935년의 한해가 끼친 어려움은 퇴학
아동수가 격증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16)
부안군내 8개 공보교의 퇴학 학생수는 4
월부터 10월 말 현재 154명이었다. 원인
은 농촌 불황으로 학자금을 낼 수 없어서
퇴학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농촌불황으로 취학아동 격감’ 이라는
17)
기사, 한해로 인한 1935년의 취학아동 감
소라는 기사에서 볼 때 취학아동 감소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부안지역에서 흔
삼간·궁안 사람들 물싸움 기사 「매일신보」 1936.7.16. 히 겪는 일상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것은
‘1면 1교’라는 주장이 헛구호에 그칠 뿐
안 사람들 100여 명이 대치하며 물싸움이 났다. 14) 원 그 내용을 들추면 속빈 강정임을 알 수 있다.
인은 궁안리 농민들이 모내기를 위해 주산면 저수지
의 물을 끌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 물은 삼간저수지
를 경유하게 되는데, 삼간리 농민들이 이 기회에 삼간 1939년 삼간평의 가뭄
평의 모내기를 마치고 물을 넘기겠다고 하면서 싸움
이 시작된 것이다. 급하게 부안경찰서에서 경찰들이 행안면 바닷가 마을의 어려움은 일제 강점기 내내
나와서 싸움을 말리고 중재하면서 두 마을이 물을 나 계속되었고 일제 말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아일보
누어 쓰기로 하고 물싸움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특파원 김정실 등은 1939년 10월에 부안 지역을 조사
물싸움은 다음 봄에 모내기철이 되면 개인 사이와 마 하여 르포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18) 이들이 찾은 곳
을 간에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폭발성이 강한 문제로 은 행안면 삼간(三干) 마을이다. 이 마을은 바닷가의
14)「동아일보」 1936. 7. 16. 15)「동아일보」 1932. 8. 19. 16)「매일일보」 1935. 11. 15. 17)「동아일보」 1932. 5. 17. 18)「동아일보」 1939. 10. 17.
020 부안이야기·2018년/겨울/통권제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