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 - 부안이야기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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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대를 간척한 곳이다. 세 번에 걸쳐 어려운 간척공                     들어가는 왼편 담 밑에는 퇴비 저장소가 있고 마당에
                   사를 하여 이룬 마을이라 하여 ‘삼간’이라는 이름을 얻                    는 각종 소나무 껍질, 피, 쑥, 남은쟁이, 피마자(아주까
                   었다. 간척 지역에서 벼를 생산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                     리)잎, 고구마 잎과 줄기, 호박잎 등을 따로 맷방석에

                   았다. 첫째는 농업용수 문제, 둘째는 식수문제, 셋째는                    널어 말리고 있었다. 이들 가족은 지푸라기 걱정이 컸
                   해일, 마지막은 질병이다. 그러다 보니 마을이 벌판 삼                    다. 지푸라기가 없으면 부업인 가마니 짜기도 계속할
                   간들 한가운데 있는 곳이라서 1939년에는 한해(旱害)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얼굴에는 비장감도 들고
                   로 어려웠지만 한해가 없을 때는 홍수를 만나는 그런                      웬만한 것에는 무감각한 얼굴들이었다. 행안면 삼간

                   곳이었다.                                             평이 이런 형편일 때, 행안 바닷가의 다른 마을도 크게
                     1939년 당시 삼간마을은 총호수 17호, 116명의 마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을 사람 중 16호가 농사를 짓는데, 소작 겸 자작농민
                   이 2호, 나머지는 남의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다. 이

                   곳의 매년 생산량은 벼 422석, 보리 22석, 잡곡 20석                 행안은 바다였다
                   에 달했지만 1939년에는 가뭄으로 벼는 전혀 심어보
                   지 못하고 밭농사는 겨우 1정 8단에 심었을 뿐인데도                      계화도가 간척이 되기 전만 해도 배는 궁안의 수문
                   콩, 서속, 고구마 등이 반절 이상 피해를 입었다. 부득                   통까지 들어왔다. 대벌리 앞 새봉산 앞에는 제법 큰 중

                   이 논 16정 9단보에다 서속과 메밀을 대작(代作)했지                    선배가 정박했다. 대벌리는 물론, 계화도, 문포 앞 바
                   만 이조차도 가뭄으로 전부 말라버린 상태였다.                         다까지 행안면에 속했다.
                     당국의 조사에 의하면 10월 7일 현재 이미 2호는 이                   식량 증산이라는 목표를 위해 계화도가 물막이 공사
                   사를 갔다. 15호 중 현재 식량 보유량으로는 1개월 정                   로 막히면서 행안은 바다를 잃었고 이제는 새만금 공

                   도 살아갈 농가가 2호, 5일 이내 살아갈 수 있는 호수                   사로 인해 계화도는 섬의 지위까지도 상실했다. 큰 자
                   는 13호로, 가진 것은 보리가 한 섬 두 말, 벼가 3두에                 연의 변화가 우리 앞에 전개되지만 우리는 미래의 전
                   불과했다. 부녀자들이 해초와 초근목피에다 잡곡을                        망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속에서 개발이나 환
                   섞어 조반석죽(朝飯夕粥)을 끓이는 집이 2호이고 매                      경 보전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이 갈리면서 갈등의 골

                   끼니 죽만 먹는 집이 13호인 형편이었다. 대용혼식용                     은 깊어졌다.
                   으로 이미 채취해온 것이 18관 700돈, 쑥 13관을 저장                  아직도 행안의 궁안·삼간평에는 3대째 고향을 지키
                   해 두고 있었다. 살기 어려운 사람들은 당국의 대책으                     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이들의 이야
                   로 북조선 지방에 이미 5명이 지원해서 동네를 떠났고                     기를 듣고 기록하는 것이 역사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

                   나머지는 매일 풀베기로 연료를 장만하거나, 다른 동                      이라고 생각했다. “고런 쓰리고 아픈 얘기를 알아서 어
                   네에 일하러 가서 날품을 파는 등 생활을 위해 필사적                     따 쓸라고 그런데여?”라는 누군가의 갑작스런 질문에
                   이었다.                                              말문이 닫힌다. 기억이라는 역사창고에 넣기 위함이
                     가축은 예년에 다른 데에서 소 다섯 마리를 빌려와                     라고 말한다면 너무 막연하고 성의 없는 답변일까.

                   사육하고 돼지는 여덟 마리를 길렀지만 금년은 먹일                        행안은 바다였다. 아직도 궁안과 삼간평에는 바다
                   가축사료 문제로 소 한 마리와 돼지 한 마리를 기를 뿐                    냄새가 난다.
                   이다. 기자 일행이 이 동네 오오동(吳五童)의 집에 들
                   어섰을 때, 그는 아들과 함께 가마니를 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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