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 - 부안이야기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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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 술집에서는 밤새도록 장구소리와 북장단으로 이르는 2등 도로, 군청과 면소재지를 연결하는 3등 도
뚱땅거렸고 일본노래들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6) 로, 그리고 등외도로다.
큰다리가 행정구역으로는 하서면에 속했지만 행안 도로를 만들 때 농지를 잠식하거나 도로 개수 시기
바닷가 사람들은 이곳을 내 집 드나들 듯 했다. 돈지 가 농사철과 겹치면 농민들의 어려움은 컸다. 1924년
사람들이나 산내 사람들, 중계 사람들은 큰다리를 거 에 행안면 바닷가를 지나는 등외도로 건설이 있었다.
쳐야 부안으로 갈 수 있었다. 부안에서 일보고 가던 산 농민들이 개간한 논에는 농사를 위해 겨울부터 논에
내 사람들은 해질녘에 이곳에 닿으면 주막에서 하룻 다 물을 잡아 두어야했다. 그러나 행안에서는 봄에 도
밤 몸을 풀고 다음 날 발길을 재촉했으니 큰다리는 근 로를 개수하려다 보니 도로가 지나는 수문 근처의 논
방의 교통의 요지였다. 을 갈아엎어서 물이 고이지 않도록 조치했다. 봄에 신
큰다리 건너기 전 오른쪽에는 매가리간
이 있었는데 큰 부자인 미츠나가(松場)의
대교지점이다. 이곳 사람들은 송장이 운
영하는 매가리간을 ‘산쟁이 매가리간’이
라고 불렀다. 해방 전까지도 풍요로웠던
큰다리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꼬였고
일본사람들도 상당히 살았다. 그리고 다
리 건너 왼편에는 현재 대교교회가 자리
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하서주재소가 있
던 곳이다.
삼간평 아이들에게 두포천은 놀이터였
다. 이곳에서 멱을 감고 고기도 잡았다.
대교 관문의 물을 빼는 날이면 풍천장어,
메기, 참게 등이 많이 잡혔다. 밤에도 관
솔불을 들고 밤새도록 민물고기를 잡느
라 주변 마을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신작로 건설과 농사짓기
일제강점기에는 도로의 등급을 4종으
나문재의 독성 및 흉년으로
로 구분하였다. 경성으로부터 도청 소재 행안면에 부종환자가 100여 명
발생했음을 알리는 기사
지나 주요 철도역을 잇는 1등 도로, 도청 「동아일보」 1924.10.17.
소재지 간 혹은 도청 소재지에서 군청에
6)고삼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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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1_행안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