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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제 강점기의 오산농업



                  1) 농지정책과 영농형태

                    일본은 우리나라를 자기들의 부족한 식량공급기지 확보와 그들의 공업발전을 위한 공업원료 생산

                  국으로 활용함과 동시에 상품시장, 자본의 투자시장으로서의 이용, 그리고 그들의 최대 목표인 아시
                  아대륙의 침공을 위한 군사적 전초기지로 이용코자 1910년 우리나라를 합방형식을 통하여 그들의 치

                  하에 넣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토지조사사업으로 1910년에 토지조사령을 공포하고 9월부터 농가를

                  대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은 지세의 부담을 공평히
                  하고 지적을 분명히 하여 그 소유권을 보호하고 그 매매 양도를 간편 확실하게 함이었다. 또, 토지의

                  개량과 이용을 자유롭게 하며 그 생산력을 증진시키는데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참된 목적은 토지조
                  사를 통하여 일본인의 토지점유와 투자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하여 토지의 강점 및 면적을 넓히자

                  는데 있었다. 그래서 토지소유자에게 신고에 일정한 기한을 설정하고 신고 수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신고를 기피하거나 그 까다로운 신고 절차를 감당할 수 없었던 많은 농민들이 신고를 하지 못하도록

                  하여 그 소유권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말았다. 따라서 토지조사 결과로 인해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부의 토지는 이미 1800년대 말부터 일본자금 유입이 시작되어 내륙지방에서는 전
                  지와 가옥매입이 있었는데 일본 상인들의 부동산 소유허락으로 1901년부터 내한이 부쩍 늘었고 토지

                  의 매점매석이 시작되었다. 경부선 철도건설 사업을 위해 한국에 들어온 일인 기술자들에게도 철도
                  역이 신설되는 지역과 주변 토지매입 열풍이 불었다. 특히 1908년 12월 일본인에게 특혜를 주어 이민

                  을 장려, 알선함으로서 한국에 대한 전위적 침략 거점으로 설립되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부 일
                  본인의 대농장에 시가보다 훨씬 싼 값으로 농지를 불하함으로서 토지를 강탈해 나가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가난하고 무지했던 우리 농민들의 토지는 남아날 수가 없었다.
                    1922년 당시 오산이 속해있던 수원군의 전체농가는 2만2천5백81호, 농가인구는 12만3천31명으

                  로 농가는 총 호수의 85.5%였는데, 그중 오산(성호면)의 농가는 1천56호였다. 수원군 전체농업의 경
                  영형태를 보면 83% 이상이 전업농이었으며 소작농은 51.6%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그중에서

                  도 오산은 소작농 비율이 50.6%로 낮은 편이었다. 또한, 오산은 전업농 비율이 73.3%로서 다른 지역
                  보다 현저히 낮은 반면 겸업농 비율은 수원군 전체 15.7%에 비해 26.7%로 월등히 높았다. 이는 수원

                  군내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지주는 한 명도 없고 자작농이 적은 원인도 있었지만, 다른 내륙지방보
                  다 교통이 좋았기 때문에 상업 등 타 업종에서 가계수입을 얻기 위해 부업을 많이 했을 것으로 추정
      오산시사
                  된다. 또 송산면, 서신면, 우정면 등 해안에 위치한 지역에서는 염전이나 어업종사자가 많았던 것으
                  로 여겨진다. 또한, 1920년대 중반 수원군에는 21개 면에 2백77개 리가 있었으나 정거장이 있는 곳은
      제

      5           수원면, 성호면의 오산리와 시장이 있던 음덕면 화장리뿐이었다. 이 지역들을 중심으로 몇 곳이 작은
      권
                  시가지를 이루고 그 이외는 대부분 농촌부락으로서 집단부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오산은 이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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