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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오산을 포함한 수원지역의 한우는 우량역축으로 소문이 나고 고기 맛이 좋아 일본과 러시아
                  로 수출(1만3천 마리 정도)되었다고 하며, 당시에 농가 5~10호마다 한우 1마리를 사육할 정도로 축산
                                                                                                                  39
                  열기가 왕성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가가 일을 시키기 위해 한우를 사육하였으며, 당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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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들은 소의 고기만을 이용하고 우피는 가공처리 방법을 몰라 크게 이용되지 못하는 수준이어서

                  전체로 보면 국내의 농가자급 정도 수준에 머물렀다.                                                                    · 경제  /  보건





                  4) 양잠업 실태                                                                                       · 환경위생
                    정치, 경제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기반을 구축한 조선왕조는 잠업을 농업 못지

                  않게 중시하여 국가적인 산업으로 육성하였으며 역대 왕들은 농상이 의식의 근원이라 하여 이를 주                                            · 사회복지

                  요 국정의 지표로 삼았다. 조선 초기부터 잠업은 상공업과 같이 관 주도로 발달하게 되는데 잠업이
                  다른 산업과 달리 상목재식 기간이 오랫동안 소요되는 특수한 여건이므로 국가에서 장기적으로 육성                                             /  사법
                  했다. 정종 2년(1400)에 선잠제향(先蚕祭享)을 지냈다는 기록과 3대 태종 대에 친잠례(親蚕礼)를 궁                                      · 치안

                  중에서 실시했으며, 태종 15년(1415)에 『양잠경험촬요(養蚕経験撮要)』가 편찬되었다. 그리고 21대 영

                  조 대에는 「친잠의궤(親蚕儀軌)」를 작성 친잠실시를 했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왕실에                                         · 소방
                  서 잠업에 관심을 갖고 농민에게 권잠을 하고 잠업성공을 축원하였던 것이다.                                                       · 언론
                    잠업의 육성정책으로 조정에서는 잠업의 기술보급과 장려를 위해 『양잠경험촬요(養蚕経験撮要)』,

                  『잠서(蚕書)』, 『농상목축서(農桑畜牧書)』 등 양잠 관련 책자를 편찬·보급하는 한편 뽕나무 재식을 위

                  해 잠종지법(蚕種之法), 공상잠실법(公桑蚕室法), 양잠조건 등의 법을 만들어 각호(各戸)나 각사(各
                  司)에서 뽕나무를 의무적으로 심고 가꾸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처벌하였다.
                    수원 관내에도 양잠이 크게 장려되었는데, 특히 오산의 독고리(과거 수청동의 한 마을 이름) 지역

                  이 양잠이 대단히 번성하였다고 하며 지금까지도 이곳에 뽕나무를 많이 재배했던 상골밭이라는 지명

                  이 있다. 오산동에도 상골밭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이곳 역시 오산천변 일대에 뽕나무밭이 많아 붙
                  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오산종합운동장 위쪽과 청학동 주변, 초평들의
                  천변과 남촌동, 대원동 일대에 뽕나무들이 많이 잔존해 있었다. 이렇듯 오산지방의 토질이 뽕나무재

                  배에 적합할 뿐 아니라 기후도 4월부터 6월 초까지 건조하여 누에사육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양잠이 성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양잠기술의 후진성은 물론 누에의 질병이 많았고 또한 부
                  녀자의 부업형태에 머물러 고품질 대량생산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15~16세기경 이후에 민간의 양잠 열이 고조되고 양잠이 널리 성행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상

                  목재식이 확장되었고, 잠서가 번역되어 양잠기술이 보급되었으며 사회경제의 발달로 견직물의 수요

                  가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초기에는 특권층에게만 면주(綿紬) 착용을 허용하던 것이 일반
                  인들에게도 비단을 입을 수 있게 됨에 따라 양잠업이 농가의 부업으로 정착되었고, 견직물의 직조가
                  사적인 수공업으로 바뀌어 상품화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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