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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와 함께 보는 정대위 목사 이야기
1917년 10월 31일.
북간도 용정에서 독립운동가인 정재면 목사의 아들로 출생 1)
정대위 목사 가정의 믿음의 첫 열매는 그의 할머니로 보인다. 그의 할머
니는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정대위 목사
의 할아버지 역시 장손으로서의 가정 임무 때문에 평양신학교로 가는 것을
포기했을 뿐,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정대위 목사의 할머니는 평소 기도에 “손녀 딸을 주시면 전도 부인으로,
손자를 주시면 목사로!”하고 기도하였다. 정대위 목사가 출생하자 할머니
는 “다윗아, 너는 목사야!” 불렀는데 할머니의 바램대로 다윗이 그의 이름
이, 목사가 그의 평생 소명이되었다. 다윗의 한문 표기가 바로 ‘대위(大爲)’
이다.
정대위 목사는 자기 고향 용정을 “학향(學鄕)”이라 불렀다. 그곳엔 선교
단체가 경영하는 몇개의 탁월한 학교들이 모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 정재
면 목사가 가르치던 은진중학교 , 명신여자중학교, 광명중학, 광명여중학,
2)
대성중학, 동흥중학 등의 여섯 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들로 인해서 북간도
의 명동에서 지성과 민족 해방의 정신을 겸비한 걸출한 인재들이 다수 배
출되었다.
1885년 미국 장로교 언더우드와 감리교 아펜젤러로 시작된 한국의 개신 은진학교
1920년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로
교 선교 초기에는 ‘선교지역 분할협정’에 의해 외국 선교부와 교단들이 활 교명 “은진(恩眞)”은 “하나님의 은혜로
동했다. 이에 따라 평안도와 황해도의 서북지역(관서지역)은 미국 북장로 진리를 배운다”는 뜻을 가졌다.
현재 학교 건물은 철거되었고
교가, 함경도와 간도의 관북지역은 캐나다장로회가 맡는 방식으로 선교지 무장경찰병원과 공장이 들어서 있지만
역을 분할했다. 함경도와 북간도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은진학교가 있었던 장소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신학에 영향을 받았다.
정대위 목사는 태어나면서 주위에서 만날 수 밖에 없던 캐나다 선교사들
을영국인으로 불렀다고 술회하였다. 백인을 보면 미국인으로 착각하는 것
1) 2016년은 정대위 목사의 출생 후 100년이 되는 해이다.
2)훗날 민중신학과 민주화운동의 주역들로 우리가 기억하는 한신대(한국장로회신학대학교의 줄임말)의 핵심 인
물인 강원용,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가 이 학교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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