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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와 함께 보는 정대위 목사 이야기
1941년. 경북 예천에서 목회 시작
7)
모든 목회자들은 자신의 첫 목회지를 잊을 수 없다. 정대위 목사도 마찬
가지인데, 동지사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송창근 목사의 부름에 따라 예천
교회(경안노회 소속 지교회)에 담임 전도사로 부임한다. 이때 그의 나이 23
세였고 갓 결혼하여 아내와 함께 허니문을 즐기게 된다.
이 시절 정대위 목사는 주로 독일어 원서들로 이루어진 300권 이상의 장
서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그의 거처는 예천과 예천 인근의 지성
인들의 사랑방이 된다. 정대위 목사는 이 현상을 두고 “설교 스타일이 아닌
전혀 다른 전도였다”고 말한다. 이 때의 경험이 워낙 감미로웠기에 예천을
제 2의 고향으로 부르게 된다.
이해에 정대위 목사는 강도사 자격을 받고, 1942년에는 경북노회에서 목
사 안수를 받는다. 그러는 과정 중에 예천교회를 떠나 김천교회로, 그리고
는 영주교회로 임지를 옮기게 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를 언급해
보면, 정대위 목사가 김천 황금동교회에서 송창근 목사와 협동목회에 참여
한 것이다.
김천의 황금동교회는 1901년에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교회인데, 송창근
목사가 1939년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미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했
던 송창근 목사의 두 번째 목회지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자기 제자들과 함
께 하나의 이상적이며 모범적인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한다. 8)
정대위 목사(1944년)를 비롯하여 공덕귀, 조선출, 김정준이 함께 이 이상
적인 협동목회에 참여하게 된다. 김천이라고 하는 시골 마을에, 한국 교회
7) 한해 전, 1940년에 김재준 박사는 한국신학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설립한다.
1901년은 한국 교회사의 걸출한 인물 4명이 탄생한 해로 유명하다. 김교신, 김재준, 이용도, 함석헌이다. 김교
신과 함석헌은 무교회주의자들이었고, 김재준은 학자로서 소위 ‘한신’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이 중 정대위 목
사는 김재준 목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정대위 목사의 회고록에서 이용도 목사의 절친인 이호빈 목사
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밝히는데, 그와 함께 이용도 목사의 이름을 언급하며 심정적인 유대관계
를 피력한 바 있다. 이용도는 감리교 목사요 부흥사로 유명한데 신비주의자로 내몰려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정대위 목사는 김재준과 같은 지성적 영향 뿐만 아니라, 문학가요 신비가이며 초월성을 강조한 이용도로부터
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혼합주의(syncretism)라는 이론을 그가 공부하기 이전에 정대위
목사의 인생에는 이런 다층적 경험이 융합하여 자리잡고 있었다.
8) 황금동교회는 현재 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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