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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와 함께 보는 정대위 목사 이야기
과 유사한 셈이다. 정대위 목사는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자연스럽게 캐
나다 선교사들과 근거리에서 생을 시작하게 되는 셈인데 그의 이러한 ‘친-
카나다’ 환경은 그의 토론토와 오타와 생활을 너머 임종한 밴쿠버까지 이어
진다.
1935년. 평양 숭실학교 졸업
정대위 목사가 숭실을 졸업할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도산 안창호를
대면한 일이다. 그 날은 3월 4일이었으며 졸업 하루 전이었다. 평양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던 오병식당에서 큰 마음을 먹고 친구들과 카레라이스 한 접
3)
시씩 주문하여 화려한 졸업만찬을 자기들끼리 갖는다. 한참을 떠들며 보
통 젊은이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미래 계획과 포부를 늘어 놓는 중이
었다. 그때 정대위 목사는 “나는 목사가 된다. 민족의 지도자가 된다. 영적
인 지도는 중요하다. 될바에는 좋은 목사가 되겠다”고 호언장담하게 된다.
그때 옆 박스에 있던 한 여성이 다가오더니 정대위 목사와 친구들을 자
기 자리로 초청하여 한사람을 만나게 한다. 바로 정대위 목사의 “한평생 영
웅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그후 일어난 일을 정대위 목사의 회고록에서
옮긴다:
도산 안창호
그는 조용하고도 우렁찬 목소리로 “누가 목사님이오”하고 우리를 둘
정대위 목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한평생 영웅’으로 여겼다. 러보셨다. 우리들은 모두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었다. “접니다”하고
열 여덟살 소년이었던 자신에게 나는 한걸음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 목사님”하고 그는 우선 천천
“목사님!”이라 부르며
민족 정신을 일깨우라 당부했던 히 담배불을 재털이에 비벼끄셨다. 그리고선 “용서하십시오. 이건
도산의 말씀이 생각나 대전 감옥에서 배운 재주이외다”하셨다. 그 다음 그는 “목사님”하고
해방 후 끊임없이 정계 입문의 유혹을
받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내 손을 잡아 주셨다 … 여드름이 바가지를 쓴 열여덟 소년, 그러나
목사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했다.
그는 나를 “목사님!’”하고 부르셨다. 사십 구 년 전의 옛 이야기. 그러
나 그것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날마다 감격스런 하나의 증언이다.
그의 악수는 아직도 내 바른손에 쥐어져 있다. 4)
3) 이때의 일이나 그가 일본 유학생활을 회고하는 여러 이야기를 통해서 볼 때, 그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궁핍하
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넉넉함’이 베풀기 좋아하고 비교적 낙관적이었던 그의 성품과 기질을 형
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4) 정대위 회고록 <노닥다리 초록 두루마기> p.18. 종로서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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