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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와 함께 보는 정대위 목사 이야기
만다. 전쟁으로 인해 민족이 가장 어려울 때, 장로교회는 스스로 분열하여
민족적 대오를 저지르게 된다.
이런 분열의 쓰라림은 정대위 목사를 비롯한 당시 한국 교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게 되며 오타와한인교회가 세워질 무렵, 교단에 속하지 않은 초
교파 교회의 형태를 선택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1947년. 캐나다 토론토 대학 대학원 유학 (1949년 졸업)
1947년 여름, 정대위 목사는 캐나다 연합교회의 장학금을 받고 토론토
대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는 미군정청에서 여권을 발행했었는데 그가 받은
여권번호는 81번이었고, 해방 후 외국으로 떠나는 유학생의 첫번째 여권이
었다. ‘제 1회 미국 유학생’ 33명이 인천에서 배를 타게 됐는데 정대위 목사
가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이미 남산에 장로신학교와 부산의 고려신학교가 세워진 후였는
데 정대위 목사가 유학하던 해 봄에 앞서 언급한 자유주의 신학 문제로 학
생들의 고발을 받게 된다. 김재준과 송창근을 문제삼고자 신학생 50명이
연서를 작성하고 고발했던 것인데, 여기에 정대위 목사까지도 연루시킨 것
이다. 결국에는 총회로부터 아무 문제없음이 밝혀지지만, 유학을 떠나려는
그의 마음에는 혼란과 슬픔이 겹겹이 쌓이게 된다.
토론토대 유학 시절, 정대위 목사는 서로 어울릴 것같지 않은 두 가지를
같이 공부한다. 하나는 토론토대에서의 기독교 사회학이었고, 다른 하나는
(좌) 유네스코와 운크라의 기증으로
웨스턴 테크놀로지의 인쇄학교에서 공부한 인쇄술이었다. 그가 귀국하면 제작된 초등학교 교과서
신학교를 떠나서 신문을 경영하려했기 때문이었는데 훗날 이 계획이 유네 (우) 1951년 초등학교 교과서를 공급
할 긴급 원조자금 제공을 결의한 유네
스코와 운크라(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사업 계획의 스코와 운크라의 지원에 의해 건립된
모체가 되었고 대한국정교과서 인쇄 공장의 기본 설계로 이어지게 된다. 학 대한문교서적 인쇄공장 (추후 ‘국정교
과서’로 명칭 변경). 교과서 인쇄공장
문의 이론적인 세계와 현실의 구체적인 삶의 세계를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설립 지원은 한국에서의 첫 유네스코
활동이었다.
결부시켜 보려는 그의 근본적인 의도를 실천했던 것이다. ‘실사구시’의 실
학의 이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공부였다.
그가 졸업할 시기에 거둔 학문적 업적은 두가지인데, 첫째는 신학박사 학
위 논문 개요로 제출한 <프로테스탄트 교회 분파론>에 대한 논문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와 역사>라는 저서였다. 두 번째 논문이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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