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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와 함께 보는 정대위 목사 이야기
1950년 5월에 출판되는데, 그 시절에 등장한 토인비에 대한 상세한 언급과
함께 토인비를 한국 지성계에 소개하게 된다.
또한 토인비의 책을 번역함으로써 한국에서는 정대위 목사가 역사가 아
놀드 토인비를 한국에 최초로 소개한 사람으로 기억하게 된다. 그러나 노
년에 정대위 목사는 자신과 토인비를 연결시키는 것을 좋아하지만은 않았
는데, 그 이유는 “후기의 토인비는 그 자신의 역사 형식론에 사로 잡혀 있어
서 그야말로 화석화되었으며 시나일(노쇠)한 사상가가 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라 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정대위 목사는 서구 사상
에 대한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예찬하는 수입 학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는 이론과 그 이론을 말하는 학자의 말과 글을 그 흐름으로부터 면밀히 이
해하고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던 안목을 가졌었고 이를 평생 잃지 않
았다.
그가 학위 중이던 1948년 송창근은 미국남 캐롤라이나에 머물면서 휴앙
과 함께 학교를 위한 기금을 모금하던 중이었다. 이것이 그가 미국을 마지
막으로 방문한 것이었으며, 이 때 정대위 목사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토론토대를 졸업한 정대위 목사는 캐나다 연합교회의 파송
을 받아 캐나다 BC주의 일본인 교회 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의 계획은 가
을까지 이 교회에 있다가 선편으로 귀국하는 것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
도 신학교만은 떠날 작정을 하고 있었다. 이 즈음에 서울 초동교회의 담임
목사로 청빙을 받는다. 한국 전쟁 직전이다.
1950~1953년. 초동교회 담임목사
귀국길에 오른 정대위 목사는 초동교회 담임 목회를 하면서 여러 역할을
동시에 맡게 된다. 한신대 교수로, 한국일보 논설위원 겸 제작부장으로 활
동한다. 그리고 고려대, 동국대 등에도 출강을 한다. 1951년에는 유네스코
와 인연을 맺을 무렵이었는데, 문교부에 등용된다. 그리고 피난 장관실에
서 자리를 잡고 동란에 의하여 파괴된 우리 나라의 교육, 과학, 문화의 시설
이며 인적 손실들을 자세히 유네스코에 보고하는 문서를 작성하는 막중한
일을 맡는다.
초동교회 웹사이트에는 당시 목회자 정대위 목사에 대한 공헌과 그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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