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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와 함께 보는 정대위 목사 이야기



          한 고마움이 잘 기록되어 있다:

             “부산으로 피난을 간 초동식구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니 이것이 바로 부산 피난 초동교회의 시작이다. 당시 교
             우들은 부산에서 유네스코 및 조선신학교 학감으로 바쁘게 업무
             를 보시던 정대위 목사를 찾아가 에배를 보게 해달라고 종용하였
             고, 결국 흩어졌던 교인들이 모여 교회를 재건하고 회사 사무실에
             서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된다.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된 7
             월 말에 한장형 집사가 초동교회 재건을 위하여 교우들이 모은 5만
             환의 정성을 가지고 먼저 서울로 올라가게 된다. 처음에는 을지로
             에 있는 최복음 집사 댁에서 정대위 목사 및 여러 교우들은 초동교
             회의 재건을 위하여 헌신을 다한다. 그 결과 전보다 넓은 교회 부
             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즈음 정대위 목사는 교회의 일 이외에도
             유네스코와 한국신학대의 일을 모두 맡고 있었는데 8월 29일에는
             다른 일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당회장직을 사임하였다.                 10)

           명예나 자신의 안녕을 좇았다면 이와 같은 일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대위 목사는 자신을 찾아오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
          이는 일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1953 ~ 1954년.
          프랑스 소재 세계유네스코 본부에 한국대표 연락원으로 파견 근무

          1956년. 예일대 유학

           1956년, 정대위 목사는 세번째 유학길에 오른다. 두 가지 점에서 이전의
          유학과는 달랐다.

           첫째, 정 목사의 부인과 함께 하지 않았다. 그의 부인에게도 공부할 기회
          가 열렸는데, 그곳이 토론토 대학이었다. 중년이 된 이 부부는 일년 동안 토
          론토대와 예일대로 서로 떨어져 학문에 전념하게 된다. 둘째, 정대위 목사
          는 전공을 인류학으로 바꾼다. 유학의 동기와 필요성을 그가 느낀 것은 유
          네스코 시절에서 였는데, 프랑스 인류학자인 알프레드 메트로 (Alfred


           10) <초동교회 웹사이트> http://chodong.or.kr/ 교회소개/교회역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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