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 - 전시가이드 2020년 05월호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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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폭 백납병풍
《10폭 백납병풍》에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작품 7점을 비롯한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 남리(南里) 김두량(金斗樑, 1696〜1763),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 죽리(竹里) 박동보(朴東普, 1665?〜1729이후?) 등의
조선후기의 쟁쟁한 대표 작가들의 작품들이 함께 장황되어 있다.
문탈사도〉의 전체 경물과 정선이 부채 선면에 제작한 해인사 작품 그리고 오 성을 보여 주고 있어서 매우 인상적이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색채 또한 그의
늘날의 해인사를 비교한 결과, 그림에 등장하는 장소가 ‘해인사’ 라는 것도 거 앞선 그의 모든 작품들과 차별되는, 그야말로 오늘날의 현대적인 그림으로까
의 확실해 졌다. 셋째 앞선 두 점의 〈사문탈사도〉와 이번에 발견된 정선의 〈사 지 비춰지는 신선함과 새로움이 느껴진다. 이렇듯 이번에 발견된 정선의 〈사
문탈사도〉가 서로 비슷한 유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반복적으로 제작되 문탈사도〉의 조형특징에서도 그의 앞서 발견된 두 점의 〈사문탈사도〉와 크게
었다는 것도 확실해 졌다. 넷째 이와 같이 정선이 〈사문탈사도〉를 반복적으로 차별될 뿐만 아니라, 그의 주요 대표작과 비교해 봐도 매우 특별한 이색적, 이
제작한 것은 다름 아닌 선비, 사대부 계층에서, 서로간의 안부를 묻고 우정을 국적, 현대적인 멋이 느껴지는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잊지 말자는 오늘날의 연하장과 같은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증거가 된다. 끝으
로 조선시대의 〈고사인물도〉는 대부분 중국의 고사를 제재로 삼았다면, 정선
의 〈사문탈사도〉는 조선에서 유래한 ‘사문탈사’ 고사를 제재로 삼았기에 또 다 사문탈사(寺門脫蓑)란 ‘절문에서 도롱이를 벗다’ 라는 뜻이다. 조선시대부터 이와 관련
한 두 개의 고사가 전하고 있는데, 하나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우계(
른 특별한 가치를 부여 하게 된다.
牛溪) 성혼(成渾, 1535〜1598)에 관한 고사이고, 다른 하나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과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 1506〜1559)에 관한 고사이다. 먼저 이이에
한편 이번에 발견된 정선의 〈사문탈사도〉는 그 어떤 그의 대표작과 견주어도 관한 고사는, 율곡 이이가 43세 때인 선조 11년(1578) 무인(戊寅) 겨울의 눈이 많이 온 어
전혀 뒤떨어지지 않은 명작 중에 명작이라 할 수 있겠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느 날, 소를 타고 나가 해질 무렵에 파주(坡州) 우계(牛溪)에 머물고 있던 성혼을 찾아가 밤
전체 화면을 하나로 묶는 정교한 공간 배치와 세련된 필력 그리고 선명한 색 새 대화를 나눈 내용이다. 즉 이이가 해질 무렵에 약속 장소인 우계에 도착하여 사립문을
열고 작은 방에 혼자 앉아있는 성혼을 만났으며, 긴 겨울밤 내내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
상의 조화 등은 격조가 높게 보여 진다. 화폭의 크기는 작지만 부감법과 계단
닭이 우는 아침을 맞이했다는 내용이다. 다음 조식에 관한 고사는, 조식이 지리산으로 가
식 구도로 웅장하고 장엄하게 보이게 하였으며, 인물 포즈나 포지션은 마치 는 길에 충청도 보은(報恩)의 현감이었던 대곡(大谷) 성운(成運, 1497〜1579)을 방문하였
영화의 여러 장면을 한 화면에 다 담아 놓은 것처럼 움직임까지 잘 묘사해 놓 을 때, 동주 성제원을 처음 만나 해인사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였는데, 이를 잊지 않고 약속
았다. 그 밖에도 해인사 전체 가람 배치와 형태를 빈틈없이 구성해 놓은 것과, 한 날에 해인사에서 만났다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다시 설명하면, 조식은 성운을 통해
동주 성제원을 처음 만나게 되었으며, 그 자리에서 조식은 성운에게 오래 벼슬살이를 하
화폭 전체의 경물에 눈으로 뒤덮여 놓아 포근하고 부드럽게 보여 지게 하였다.
는 ‘내구관(耐久官)’이라고 놀려댔다. 그러자 성제원은 자신이 성운을 붙잡아서 그렇게 되
필선은 판화라고 할 만큼 완곡하고 정교하게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완곡하고 었다고 말하면서, 조식에게 이듬해인 8월 15일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만나자고 제안, 약속
정교한 필선으로 인물과 사찰 그리고 주변 경물을 표현했는데도 소재간의 완 하였다. 그리하여 기약한 날이 되자 조식은 소를 타고 가게 되었으며, 가는 도중에 큰 비
벽한 조화, 어울림으로 회화적인 풍부한 멋이 드러나 있다. 이와 같은 정선의 를 만나 고생을 하다가 겨우 개울을 건너 해인사 일주문에 들어섰는데, 반갑게도 성제원
〈사문탈사도〉를 그의 다른 어떤 대표작과 견주어 봐도 뚜렷한 이색적인 독창 은 이미 도착하여 막 도롱이를 벗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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