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1 - 전시가이드2020년 10월호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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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 65×53cm oil on canvas 1985 숲속이야기 73×53cm acrylic on canvas 2017
발견하고 그 생성을 음미하는 것이다. 것이며 배치의 배려보다 순발력을 가진 병치에 가깝다. “공간은 시간적 지속
1)
성에 의하여 생겨나는 운동을 따라가기 마련인” 것이지만 공간의 일관된 논
이런 작품이 던지는 인상은 자유로움이고 순진함이다. 그러나 병렬적 배치나 리보다 다른 시간(이시성)과 다른 공간(이서성)을 한 곳에 놓아두는 자신만의
요약적 그리기로서 순진함은 결코 동심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적 삶,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시성과 이소성이란 그런 뜻이고 그가 동심의
사유와 감성의 자유로움에 가까우면서 자신을 세계와 맞세우는 반복적인 자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가능한 가능 공간이자
기확인에 있다. 조형적 측면에서 화면을 구성하는 근간인 공간과 시간에 대한 변신과 차이를 근간으로 생성되는 세계다.
태도 역시 동심으로써 접근한 이해의 세계가 아니라 감각적이며, 집요한 자
기 논리 안에서 구축된다. 그것은 감성과 사유라는 양가성의 조화로 나아감이 그녀의 작업은 어렵지 않다. 그래서 너무 쉽게 보아넘기기도 한다. 작가 자신
고 이시성(異時性)과 이소성(異所性)에 대한 감각적 이해와 동시성으로서 삶 도 반복되는 도상들로 이미지의 숙성이나 사유의 연관성을 고구하기보다 그
의 이해에 맞닿아 있다. 리기의 즉물적 감각에 매몰될 수 있는 위험도 없지 않다. 소재를 구성하는 타
성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소재들은 사물성의 제시
화면의 가시적 형상과 자신의 사유가 가지는 이질성과 동질성을 거부하지 않 라기보다 소재가 주는 특정한 기표의 만남으로 읽힌다. 도상적 소재란 개념과
으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이자 자신이 구사하는 가시적 형상을 언어적 분간이 힘든 형상들이다. 그리고 이런 도상과 개념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화면
의미라는 일반적 담론 자체에 맞세우는 작업이다. 목격되는 반복적인 소재들, 은 일견 단조롭고 자신의 세계 속으로 퇴행한 듯 보이기도 한다. 사실 변주와
형상들, 색채는 감각적이지만 언술로서 하나의 문장이다. 개념과 비개념의 양 변주로서 차이만 보일 뿐 소재 묘사나 색채에서 혹은 구성에서 별다른 변화를
가성을 잠재한 채 끊임없이 변하는 사물들의 형상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견지 추구한 것 같지 않고 변별력도 떨어진다. 말하자면 조형적인 실험이나 대상에
하려는 움직이지 않는 형상을 화면에서 서로 만나게 한다. 뚜렷한 사물묘사의 대한 혹은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의식의 민감함을 가시화하기보다 자신의 이야
의지에도 자신의 주관적 인상에도 매달릴 수만 없는 그 지점에서 자신의 세 기를 풀어나갈 세계를 서술하고자 한다. 시각을 빌려 말하고자 하는 것을 대신
계를 보려 한다. 생성하는 힘으로서 존재의 만남, 존재의 장소로서 자신의 그 한다고 할까. 그렇다고 소재나 색, 공간 구성을 두고 개념화된 소재들의 도식
리기를 의식하는 것이다. 적 병치라고 범박하게 말하기 힘들다. 주어진 언어의 화용으로서 발화의 차이
를 보이는 일상과 그 차이에서 생성되는 미세함은 반복이라는 동일성의 맥락
비슷한 형태의 새, 달팽이, 변별성이 없지 않지만, 꽃이나 풀로 나뉘는 식물들. 보다 반복이 보이는 차이로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구축하려는 세계는 일상언
그리고 어딘가 같은 도상으로 드러나는 집 등, 반복되는 소재는 사물로서의 어로부터 도식화된 사물을 괴리시키는 형상과 색인 셈이다. “데리다는 반복이
감각적 이미지를 환기하기보다 기억과 의미의 반복으로 개념적 성향이 강하 무엇보다 의미에 대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텍스트 속에서 혹은
다. 등장하는 소재들은 현재의 직접성을 보여주는 사물이 아니라 기억과 감성 특정한 의사소통 상황에서 동일한 단어의 반복은 단어에 대한 일의적 정의에
을 불러내는 개념이며 언어다. 그래서일까 금방 익숙해지고 어디선가 본듯하 기여하기 보다는 한정되지 않는 의미의 전이를 초래한다. 이때 의미의 전이는
다. 묘사로써 사물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언어는 결코 사물을 현전하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차이만을 드러낼 뿐이다.” 2)
재현하는, 사물 자체에 닿을 수 없다. 화면은 사물이라는 대상의 조립이 아니
라 언어의 조립이며 하나의 구문이자 한 개의 단락이다. 푸르고 붉고 거칠고
섬세한 선들은 사물의 묘사가 아니라 하나의 오브제로 작동한다. 그 자체가
자율성을 가진 오브제이자 구문인 셈이다. 사유와 감각이 만나는 지점이고 언 1) 르네 위그, 김화영 역, 『예술과 영혼』 열화당, 1979. p.111
어와 사물이 어우러지는 세계다. 사물을 보기보다 기억하고 느끼고 읽으려는 2) 페터 V 지마, 김태환 옮김, 『모던/포스트모던』 문학과 지성사, 2016.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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