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 - 전시가이드 2024년 02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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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컬럼


         김병호 작가

        ENCHANTED MEMORIES


        기억에 홀리듯 상상력을 요구하다


        글 : 이주연 (경인교육대학교 교수)




        대다수의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social network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
        는 것이 일상적이지만, 학회 세미나나 콜로키움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소개
        를 넘어 동시대 미술이나 미디어아트에 대해 발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
        다. 그런데 김병호 작가의 경우 여러 차례에 걸쳐 이러한 발표를 도맡아왔다.
        작가에게 있어 조형 언어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소통과 작품 전시에서 관
        람자와의 소통이 일반적인 수준에서의 소통이라면, 김병호 작가에게 소통의
        문제는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중요하게 고려되고 있었다. 이러한 작가에 대
        해 관심을 갖고 내 컬럼에서 거듭 소개한 바 있다(2019년 11월호/2019년 12
        월호/2020년 3월호/2022년 5월호). 작가는 최근 WWNN 갤러리(오주현, 이정
        우 공동대표)에서 <Enchanted Memories_기억에 홀리다>를 타이틀로 개인
        전(2023.12.22.-2024.1.21.)을 가졌다. 그동안의 컬럼을 통해 작가의 작품이 ‘
        공간 속 치열함으로 다가오는 고도의 균형미와 견고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언
        급한 바 있다. 이는 완벽하게 마감 처리된 입체 설치물이라는 점 외에도 설계
        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제작 과정 전반에 걸쳐 작가의 의도가 완벽하게 시각
        적으로 구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 공간과의 조화미로 인한 미감 때문이었
        다. 공간을 점유하는 전통적인 입체물에 충실하면서도 대량 생산된 점을 드러
        내면서 제의적으로 읽히게 하는 그런 상반성이 매력적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발견되던 급격한 비대칭적 균형미를 갖춘 덩어리감은 이번 전시에서도 그대
        로 지속되고 있었다. 작가를 인터뷰하였다.

        이번 전시 ‘Enchanted Memories’에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Enchanted’는 ‘(마법에 걸리듯)매혹된’의 의미로, 고대 주술 행위에서 유래된   8 Symmetrical Gardens_coloration on bronze_1,500(h)x997x915mm_2023
        ‘마법을 거는 듯 노래하다’인 ‘enchant’를 어원으로 한다. ‘Memories’는 개개
        인이 지닌 사적 기억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동안 집단으로 형성해온 공동체
        의 제도, 사회, 규율, 규범을 의미하는데, 이를 기억한다는 것은 경험적 편안함    함과 안정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를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에 익숙해져서 여과 없이 답습함을 내포한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우리가 선      마치 기억에 홀린듯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이 전시는 경험적 기억과 마법에
        조로부터 이어받은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에 마법에 걸린 듯 매혹되어 의심 없        걸린 듯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자아를, 그리고 그 자아를 기억하는 태도가 작
        이 받아질 수도 있는 자아를 상징한다.                           가의 시선과 조각적 언어로 구성된 것이다.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랜드마크적 장소 기반 대형 설치’, ‘규격화된 대칭    이번 전시 작품들은 ‘규칙성’과 ‘반복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동일한 규격의
        적 균형미’가 작가 작품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       규칙적 반복은 그 이면에 강제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규칙적 반복의 원리, 즉
        안정적이고 절제된 절대적 조형미’가 돋보인다. 현재 중점을 두는 것은 무        패턴을 발견했다면 본능적으로 강제성을 연상할 수 있다. 반복적 행위의 문제
        엇인가.                                            는 각 개체의 변별을 포기하게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개체들은 물리적 조립
                                                        과 물성의 해체를 동시에 구현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와 강제성의 충돌을
        사실 드로잉부터 대형 설치 작품까지 모든 작품의 근간이 되는 것은 늘 동일하      일으킨다. 이것은 불안을 기반으로 한 강박적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다. 개인 전시에서는 이러한 면모를 더 강하게 드러내게 된다. 동시대의 특징      이다. 이들의 출발점은 이성과 합리성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단위
        을 담는 것은 모든 미술가의 공통된 관심사이다. 이번 전시는 물질문명의 시작      화되고 조직화된 요소들이 재료로 사용된다. 작품에 사용된 재료들은 기계적
        과 진행을 직선성과 평면성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다. 인간 스스로를 위해 만      드로잉에 근거한 대량생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같은 합리적인 생산방식
        든 인공적 설정일 뿐 자연에는 절대적인 직선과 평면은 사실 존재하지 않지만,      은 기능과 규격에 의해 체계화된 산업화 시대의 조형성을 담고 있다. 이 사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곧게 뻗은 건물의 수평선과 수직선, 수많은 각진 디자       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규범과 체계들로 조직화되고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인의 물건 등 이런 인공적인 면모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학의 기하학 또한     서 체계적으로 규격화된다. 이 작품들은 설계부터 완성까지 산업 규격 체계를
        직선을 설정하는 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따르며 정교하게 가공된 부품들로 조립되었다. 분업화되고 획일화되는 물질
        Magellan/포르투갈/1480~1521)이 증명한 둥근 지구와는 별개로 우리는 훨  문명을 대변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구조가 작품에 기능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씬 오래전부터 우리의 사고가 그래왔기 때문에 쭉 뻗은 직선의 평평함에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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