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전시가이드 2024년 02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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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Tony Bevan, Red Interior, 211.5 x 217.5cm, acrylic and charcoal on canvas(unframed), 1999 ©ADAGP
(우)박재희, 폭포-사계 연작중 Red(Hot summer), mixed media on canvas, 162.2 x 130.3cm, 2023 ©ADAGP
리를 담아내자 마침내 박재희 스타일로 표현한 반구상화가 완성된다. 초기 작 한 저장고로써 정신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의 정신성에 대한 탐구는 불완
업은 유화와 아크릴화로 각각 표현하였지만 어느덧 유화와 아크릴을 한 캔버 전성이 모태가 됐다. 1980년대 대처 정부 시절 예술가에 대한 지원이 대폭 줄
스에 병행하기도 하는 실험적 작업도 했다. 유화를 전공했던 그녀에게 아크릴 면서 예술가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뇌가 시작됐고, 이후 자화상이
화를 접목시켰어도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았고 유화로 착각하는 이들조차 나 위태위태한 구조물 등을 통해 변화무쌍한 감정, 인간의 상처, 폭력적인 욕
많이 생기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천경자 화백이 사용한 ‘동양화 채색 분’과 ‘동 망 등을 표현했다. 궁극적으로 토니 베반의 작품에서 드러난 왜곡된 구도, 해
양화 붓’을 사용하는 등 새로운 시도도 했다. 그녀는 2017년 아버지의 사망으 체된 이미지, 붉은 핏빛 배경과 핏줄 같은 선들의 뒤엉킴은 불완전한 인식과
로 인해 인생의 대 격동기를 겪게 된다. 이 때부터 시작된 수많은 혼란스러운 어두운 내면에 대한 반영이 박재희 작가의 『광야』 시리즈 및 『폭포』 시리즈와
일들이 그녀 일생의 가장 큰 혼돈의 기간이었기에 광야 같은 삶에 대한 관심 동일한 맥락의 회로를 통해 고스란히 교감 되리라 확신한다.
을 두게 된다. 주변에서 이러한 삶의 역경을 통과하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 함
께 힘이 되고 서로 위로를 통해 치유하는 삶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다루었 결론적으로, 〔AIAM국제앙드레말로협회〕 회원 작가들 가운데서도 박재희 작
던 작업이 『광야』 시리즈이다. 붉은 사하라 사막을 배경으로 두 마리의 말이 서 가는 자신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은 상태로 고유의 ‘붉은 색’ 톤을 가미한 세련
로 의지하며 희망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그리며 광야의 삶을 벗어날 때 까지 된 표현을 통해 자신은 물론 타인의 상처마저 치유하는 이른바 <통찰형 작가
의 희망을 표현하였다. 더 나아가 지친 삶을 회생하는 과정에서 주변에서 생기 >인 셈이다. 이토록 개성이 뚜렷한 박재희 작가의 성장통을 더욱 연마해 주는
를 느끼도록 동기 유발해보자는 취지에서 『폭포』 시리즈가 나오게 되었다. 필 듯이, 2019년 하반기에 <COVID 19>가 느닷없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그 무
자는 박재희 작가의 대표작인 『폭포-사계 연작 중 Red(Hot summer)』에 주 렵, 박재희 작가는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지자 자유로웠던 일상을
목해 본다. 모름지기 완벽한 두 시리즈의 결합이 성사되지 않았는가? 여기서 그리워하면서 하루하루 박탈당한 기분으로 보내다 보니, 불현듯 아무런 걱정
잠시 영국을 대표하는 구상미술 화가 토니 베반(Tony Bevan)의 『자화상-내 없는 《에덴 동산》에서의 삶을 동경하게 된다. 결국 시련의 시절을 인내로 감
면화』 시리즈를 떠올려 보자. 토니 베반은 ‘마음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몸과 수함으로 인해 『군마도- 여정』 시리즈와 에덴 동산을 그리워하는 『선악과』 시
연결되어 있는가?’ 라는 스스로 던진 질문에 천착해, 30여년간 인간의 ‘이면과 리즈에 이어 『에덴동산』 시리즈가 나오게 된 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 재료선정
인식의 기억’ 등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특히, 작품 전반에 걸쳐 사 면에서도 다양한 재질을 표현하고자 수없이 많은 시도를 하면서 괄목할만한
용되는 옥스 블러드(ox-blood)색은 동맥, 힘줄과 같은 신체와의 연관성을 나 성장을 이룬다. 심지어는 ‘동양과 서양’의 독특한 표현 기법을 깊이 파고들어
타내는 것으로, 작품 속 상처처럼 보이는 옥스 블러드 색의 선은 작가만의 특 연구하게 되었고 ‘정체성’이 드러난 표현 방식에 주력한다. 따라서 이 때부터 ‘
징이 되었다. 토니 베반은 존재의 특징만을 잡아 선으로 단순화하고 그 속을 입체적인 표현’을 내기 위해 유화보다 아크릴 페인팅을 주로 하며 아크릴의 장
핏줄 같은 회로로 연결해 정신성을 드러내는 작업 경향이 작용한다. 이때 중 점인 빠르게 마르고 다양한 재료와 혼합하여 작업하는 것에 몰두할 것으로 기
요한 수단이 ‘선’이다. 그에게 선은 정신성이라는 예술적 주제를 풀어 내는 효 대된다. 토니 베반의 정신성에 대한 탐구는 불완전성이 모태가 됐다. 이에 반
율적인 도구다. 존재를 육체로부터 분리시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선’으로 해 박재희 작가는 마치 달리는 말처럼 질주하는 본능을 선명한 컬러로 묘사함
단순화시켜 이미지를 해체하고, 감정 또는 순간적인 마음 상태를 핏줄 같은 ‘ 으로써 완전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아무쪼록 박재희 작가 역시 〔ADAGP 글로
선의 회로’로 드러낸다. 토니 베반의 『자화상』 시리즈가 인간의 정신을 탐구했 벌 저작권자〕의 일원으로써, 토니 베반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로 어떻게 살아
다면, 1980년대부터는 건축물 등의 물성에도 정신성을 발견하려는 시도를 감 갈 것인가’에 대한 고뇌를 놓고 내면과 외면을 거치는 반복 성찰로 승화시킴
행한다. 건물의 통로, 서까래 등의 구조물이 소재가 되는 것. 이후 2007년부터 으로써 존재를 육체로부터 분리시켜 모든 것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선으로
는 ‘나무’로 확장하며 인간의 뇌 신경계와의 연관성을 탐구해 갔고, 2013년부 단순화함으로써 이미지를 해체하고, 특정 감정 또는 순간적인 마음 상태를 유
터는 ‘아카이브’ 연작을 통해 책이나 문서를 보관하는 선반 구조물을 불가사의 지하는 ‘새로운 정신’에 의해 극복해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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