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전시가이드 2021년 06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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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보도자료는 crart1004@hanmail.net 문의 010-6313-2747 (이문자 편집장)
엄마의 마당 91x116.7cm Mixed media 2018 한낮의 포도밭 162x112cm Mixed media 2021
지 않은 깊이를 만들어준다. 끝나지 않는다. 김보연 작가는 사진으로 찍은 듯한 극사실주의 회화를 추구하
기보다는 붓의 터치 등 회화적 특성을 살린 작업을 선호하며, 그려진 대상의
더욱 흥미로운 것은 조각칼이 지나간 빈자리를 채우는 존재들이다. 조각도가 물성을 가능한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다소 상충하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파낸 선이 하는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 첫 번째는 깊이 자체의 표
현이다. 슬레이트 지붕의 굴곡 표현은 조각도가 만들어내는 효과를 단적으로 김보연 작가의 풍경에는 흔적만이 남았을 뿐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깊이 표현에서 나아간 두 번째 역할은 사물에 닿고, 부재의 기간이 더욱 길어진다. 사람이 떠난 뒤 오랜 세월이 지나 잡초를 비롯
반사되는 빛의 표현이다. 작가는 조각도가 드러낸 하얀 모델링 페이스트 위에 한 다른 생명체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들, 빈집, 또는 폐허라 불리는 공간들
밝은색 물감과 석채를 섞어 그려진 대상에 맺힌 반사광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도 작가가 포착한 주요 풍경 중 하나다. 사람의 발길이 떠난 지 오래인 이 장
이러한 효과를 내기 위해 나무판 위에 모델링 페이스트를 바르고 선적인 요소 소가 오히려 그곳에서 살아갔을 사람들을 가리킨다. 거리를 둔 시선은 이러한
를 조각도로 파낸 후에 아크릴 채색을 시작한다. 때로는 채색 이후 필요에 따 비어있음의 감각을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히 포착한다.
라 음각을 추가로 진행하며, 조각도로 파낸 자리는 다시 물감과 석채로 채워 학창 시절부터 힘든 일이 있으면 햇빛을 쐬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영혼
넣는다. 입히고 파내고 다시 색을 입혀 마무리하는, 흡사 고려청자의 상감기법 이 치유됨을 느꼈다는 그는 자신의 작품에 그러한 빛을 담음으로써 치유의 힘
과 같은 제작과정은 일반적인 회화보다 훨씬 많은 량의 시간과 노동을 필요로 을 전하고자 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작가는 이러한 치유의 힘을 가진 빛을 ‘신
한다. 화면에 입체감을 만들어내는 조각기법과 나무판, 모델링페이스트, 석채, 의 축복과 같은 빛(divine light)’으로서 표현하였다. “작품의 제작과 감상이 단
물감 등 각기 다른 성질의 재료의 활용이다. 〈감나무〉와 같은 작업은 조각도가 순히 감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을 넘어 영(靈)을 터치하는 감동을 줄 수 있었
드러낸 나무판의 질감을 그대로 살리는 방식으로 마감하여 나뭇가지를 더욱 으면 한다.”는 그의 말은 작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표현하고, 〈슬레이트 지붕 앞 갈대〉나 〈벽돌집〉과 같은 작품의 경우 보여준다. 작가의 터치가 생생히 느껴지는 회화성과 실재감의 보기 드문 조
에는 조각도를 이용해 만들어낸 깊이 위에 석채를 이용해 실제와 같은 질감을 화가 이뤄지는, 빛의 질감이 새겨진 듯한 화면이 김보연 작가의 칼끝에서, 그
덧씌웠다. 조각도와 석채의 활용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빛과 깊이의 표현에서 리고 붓끝에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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