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4 - 2019년04월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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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전시




































        수집된 욕망의랩소디 61×53cm Oil on canvas                Mountain  of purification 61×53cm Oil on canvas







                                 2019. 4. 3 – 4. 9 갤러리루벤(T.02-738-0322, 인사동)







         Flowing Landscape                              까, 상처 입히고 괴로워하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그사이에 조그만 쿠션으로 완
                                                        충제를 넣어둔다. 작가의 작품에 항상 등장하는 쿠션은 다른 길을 가는 존재
        김형숙 개인전                                         들을 위로하기 위한 포근함과 걱정, 애틋함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 윤리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글 : 문성준(평론가)                                    하지만 이것은 강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강한 것은 언제나 부드럽
                                                        다. 약한 사람일수록, 상처를 해독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공격적인 것은, 대상
                                                        을 안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것을 안을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대
        탈경계 시대의 회화 윤리                                   상의 날카로움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으므로, 상처를 안는 쿠션이 된 것이다.
        근대화가 대상화의 역사였다면, 반동으로 태동한 현대는 타자성의 세계이다.        이것이 그의 회화 윤리다.
        많은 철학과 예술이 타자성을 주장하고 대상화를 비판하였으며, 근대는 제
        국주의와 계몽주의의 오명을 쓰고 몰락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상화가 오        작가는 이것을 위해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작품을 전개한다.
        롯이 성공하지 못하였듯이 타자성의 세계에도 불가항력적인 한계가 있었다.         첫째는 경계의 용해(鎔解)이다. 무정의(無定義), 무규정(無規定, apeiron)이 파
                                                        괴적이라면, 정의(定義, definition)는 배척적이다. 정의함은 자신이 만든 외연
        작가는 타자를 마음대로 대상화하지도 않지만,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타자성       (外延) 안에 내포(內包)할 수 있는 것만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의
        이라는 명목하에 억지로 다름으로 산정하지도 않는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는 언제나 외연이라는 경계를 통해 소외를 만들어 왔다. 많은 철학자가 정의하
        일도 있으며, 화해 불가능한 관계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작가는 그들을 그      여야 하는지, 정의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소모적인 논쟁을 해왔지만, 확실
        저 놓아준다. 그리고 우리의 능력은 거기까지임을, 양극단으로 미칠 수 없음       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경계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뿐이다.
        을 작가는 인정한다. 다만, 그 먼 존재들이 서로의 간격에 의해 다치지나 않을     대상화도 주체와 객체의 다름에서 시작되고, 타자화도 나와 너의 다름, 즉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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