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전시가이드 2021년 08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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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정의 전시포커스
2021년 <balance> 전시장 전경
선배. 당시 북한에서 피난온 수위와 발음이 정확치 못했던 손님의 잘못된 의 을 하면서 산다. 그래서 정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종의 아방가르드, 당
사소통이 빚은 해프닝이었다. 숙명여중고 전국미술공모전에 낼 작품을 봐달 시 단체나 그룹을 한다는 것은 또래끼리 생각을 만들어가는 상황이었지만, 운
라는 부탁을 하러온 아이의 어머니는 박석호의 부재를 알고 박서보 선생에게 동권에 있던 신학철, 김원 둘 다 학생신분으로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 해서 함
그림에 관한 짧은 지도를 부탁했다. 대회에서 1등상을 받게 된 아이는 박서보 께 아방가르드 운동을 했다. 그리고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이 오늘의 미술사
선생 덕에 서울예고 입학지도와 과외활동을 부탁하는데, 그때 주1회씩 명륜 에서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하종현은 자기를 끊임없이 실험하고 부정하는
동에서 유화와 데생을 가르치면서 만난 이가 김종호의 학교 친구들이었고, 그 가운데 새로운 것들이 나온다는 신념 속에서 학생들과 만났다.
인연으로 김태호는 홍익대 제자에서 동료 교수로까지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김태호 선생은 학생시절부터 국전에 출품했고 참 뛰어났다. 내가 하지 않는
“김태호 교수가 더 크기 위해서는 지금 작업에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가미돼야 스프레이 작업을 했는데, 나는 스승을 닮지 않는 학생을 칭찬하던 교수였다.
한다. 어떤 부분은 캔버스의 밑바닥이 보이고 또 어떤 부분은 요철이 두껍게 국전의 비구상 부분에서 데뷔했는데, 반反국전 운동을 한 내 영향도 있었으리
오르내리는 감정의 유입이 중요하다. 에스키스 할 때부터 리드미컬하게 감동 라 생각한다. 좋았던 것은 1968년 김태호가 홍익대에 입학했을 때, 내가 전임
을 주는 방식을 연구해보라고 여러 차례 얘기했다. 몰입된 것으로부터 벗어나 이 된 첫 해였고 나의 첫 학생이었다. 특히 김태호는 부산학생, 나는 진주출신
서 새로운 방향성을 추구한다면 더 클 수 있다. 시각적인 방법의 전환이 아니 이어서 남남이 멀리서 만난 즐거움이랄까. 워낙 김태호는 사람이 나긋하고 싫
라, 내공의 힘을 키우는 것. 그것이 대가냐 아니냐를 보여준다. 박서보가 버티 은 소리 한번 없이 심부름과 일을 잘했다. 내가 같이 일하기 좋았던 학생이었
는 것 또한 내공의 힘이다. 나는 선생도 없었고 늘 내가 생각하고 내가 문제를 고, 처음 교내에 연구소가 없어서 신촌시장에 작은 방을 얻어서 그림을 그렸
제기했다. 변화할 때는 절대로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작 는데, 전임이 되서 그 연구소를 김태호 선생이 인수받게 됐다.”
가는 자신을 신비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른 이들에게 내 과정과 교훈을 보이 사제지간 반세기, 하종현은 김태호에게 작품이 국전 아카데미즘에 경도되지
지 않는 것이 내 철학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통찰력이 있어야 하고, 지속적 열 않도록 “선생을 닮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하종현 작가의 타협하지
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김태호에겐 그 자질이 있다.” 않는 정신이 반국전 운동과 AG그룹으로, 청년 같은 오늘의 작업정신으로, 김
하종현, 내가 본(本) 김태호 태호 작가에게 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하종현은 김태호가 파주로 이주한 이
하종현은 다른 이들의 발언과 관계없이 “나는 내 길에서 내 스스로를 늘 채찍 후 일산에 사는 스승을 자주 찾는다고 기특해 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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