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전시가이드 2021년 08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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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작가와의 인터뷰 하종현 작가와의 인터뷰
게 마련한 스튜디오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공연공간이자 출판공간이던 탓에 많은 컬렉터를 찾아갔다. 작은 사이즈를 극복하고자 캔버스에 한지를 붙이는
‘순수한 관계’가 자연스레 스며있다. 함께 동고동락하던 제자의 갑작스런 비 시도를 하는데, 캔버스에 한지를 붙일 때 생긴 잔재들을 없애기 위해 지우는
보, 만남을 회자정리會者定離에 비유한 김태호는 관계란 마음의 집이자 작품 작업을 시작했다. 현재 내재율의 바탕이 된 작업은 물감을 쌓고 난 이후 생긴
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결국 아티스트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변화가 생 군더더기를 면도칼로 갈아낸 작업이다. 작가에게 지운다는 의미는 형상이 없
기고 생각도 바뀌는 것이다. 부산출생인 작가는 10대 중반 부모를 모두 잃은 어지는 작업 속에서 수평-수직을 통해 작업의 정수와 만나는 것이다. 작품초
후, 유학차 서울예고에 입학했다. 1966년 몸이 불편한 친구 부모님의 권유로, 기, 은행 셔터문이 닫힐 때의 움직임이 외재율(관찰)이라면 내재율은 외형이
서울 명륜동에 하숙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우연히 박서보 선생을 만나게 된 내면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작업이 수직과 수평으로 연결되어, 시각적 차원
다. 선생을 통해 추상을 접한 작가는 대입이후 “내가 부산을 못 가봤으니, 네 에서 평면성을 갖게 될 때 선을 긋는 행위는 쌓고 지우고 깎아내는 공간 구축
가 부산 개인전을 하면 좋겠다.”는 선생의 말 한마디에 하루 3-4시간 취침하 (건축가와 유사한)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다.
면서 100호 이상의 작업을 시도하는 열정을 보인다. 이렇듯 발전 속에서 개성 김태호의 작업은 현상을 넘어 질서와 균형을 추구한다. 평면성이 아닌 다층
을 찾는 자세는 대학시절 문화공보부 신인예술상 장려상(대학1학년)·국전 입 의 공간에 시간의 축적을 담기 때문이다. 물감을 찍어 연속된 선을 긋고 이를
선 등, 남들이 졸업 후 해내는 것들을 학창시절에 경험하도록 만들었다. 김태 반복하면서 생긴 그리드의 흔적을 정교하게 깎아 자연스러운 미감을 부여하
호는 “작가가 고민하고 변신하는 모습이 왜 중요한지”를, “항시 국제전을 준비 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내재율은 재료와 아카이브의 완성체이다. 작가는
하고, 미술관에 몇 점의 작품이 들어갈지를 계획하는 것이 작업과정의 핵심” 2003년 고향인 부산에서 제2회 ‘부일미술대상’(부산일보사 주최)을 수상하고
이라고 말한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할 운명일지라도 이를 이어가는 것은 사람 부산시립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경쟁상대는 “오로지 자신”이라는
사이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명제를 얻게 되었다. 작가라면 자기와의 싸움을 이겨내야 하고, 유행에 휩쓸
리지 않는 나만의 일을 획득해야 한다. 작업은 고통스럽지만 결과물이 나왔을
형상에서 종이로, ‘외형에서 내면으로’ 때 희열을 준다. 1999년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김태호의 작업을 정상에 올린
“얼핏 보면 인체의 어느 부분이나 윤곽이 있는가하면, 그 속에 줄무늬가 규칙 돌을 끊임없이 굴리는 ‘시지프스 신화’에 비유했고, 2004년 김복영은 ‘지워냄
적으로 지나간 듯한 테크닉 등에 매료당하게 된다.” 1983년 조정권(시인)의 비 으로써 드러나는 (은폐와 개시의) 역설구조’라고 설명했다. 그 안에서 반복되
평에서 초기작들은 면밀한 구성과 조화가 만들어낸 반추상적 창작행위로 규 는 패턴 쌓기와 긁어내기는 평면의 한계에 도전하는 회화의 조각화 속에서 ‘
정된다. 작가가 ‘극사실경향의 유행’ 속에서 추상으로 승부를 건 이유는 첫 국 지금-여기, 회화의 정의는 무엇인가’의 근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전수상과 문화공보부 최고상(비구상 부문)을 수상했을 당시의 주변 반응 때
문이었다. 은행 앞 셔터가 닫히는 시간에 사람들이 지나는 풍경은 인간 패턴과 박서보, 내가 본(本) 김태호
인체구조의 형상화(사람들이 모이고 움직이는)를 보여준다. 과거 은행은 사람 91세의 스승이 기억하는 17세의 김태호는 영특하고 성실한 태도를 지닌 호기
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였다. 초기에 스프레이를 활용한 어두운 형상은 프랑스 심 많은 학생이었다. “김태호도 이젠 좀 늙었다. 머리도 허옇고…어렸을 때 참
에서 수입한 아사천을 사용하면서 밝은 형상성을 획득하고, 한동안 이어진 리 이뻤는데. 지금도 동안이지만, 어릴 땐 말귀도 잘 알아듣고 재주도 뛰어났던
드미컬한 작업들은 1980년대 한지와의 만남 속에서 물성의 변화를 시도한다. 학생이었다. 잘해서 여기까지 온 거다. 하지만 앞으론 어떻게 내공을 키우면서
제작공방 시스템을 갖춘 판화공방을 개설하여 판화의 독자적 위상을 보여준 변화할 것인가가 숙제다. 색채도 자기가 창안해낸 독창적 시각이어야 하고.”
시기도 이 즈음이다. 한지 장인이 기획한 미국 워싱턴 전시에 박서보가 추천 두 사람의 만남은 아이러니 하게도 서울예고나 홍익대가 아닌 장애를 가진 김
하여 정창섭, 윤형근 등과 함께 ‘종이작업’을 실험하게 되는데, 스프레이에서 태호의 서울예고 동기 ‘이종호’라는 친구 때문이었다. 홍익대가 잠시 남산으로
한지로의 변화는 재료와 크기의 한계를 극복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당시 스프 거처를 옮긴 1960년대, 건물에 잠입해 그림을 그리던 박서보에게 수위는 한
레이 작업은 차가운 느낌 때문에 잘 안 팔렸지만, 따뜻한 느낌의 한지 작품은 아이의 엄마가 찾아왔다고 전달한다. 하지만 찾던 이는 9살이나 위인 박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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