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 - 전시가이드 2020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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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컬럼
Untitled, 60.6x60.6cm(each), Oil on Canvas, 2020
회화의 정통성을 간직한 평면을 사랑하고 색채를 다양하게 실험하고 있는 작가에게
미래에는 지금의 사과처럼 무엇이 또 영감을 주는 소재로 등장하게 될지 기대된다.
박미연 작가의 를 연상케 한다. 누군가 작품에서의 점, 선, 면들을 픽셀이라고 질문할 때 나는 향기로 대
답한다. 화면 속에서 거듭되는 대상의 반복적 표현을 통해 좀 더 작품에 만족을 위해 훈련
을 멈추지 않는다. 사과의 경우 “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평면, 색채, 그리고 사과 개별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반복적인 원의 형태는 작품에 몰입하게 만들기도 하
지만, 동시에 화면 밖으로 튕겨나가듯 확장하는 힘을 지닌다. 거대한 캔버스
에 사과 하나만 등장시켜 이러한 힘을 더욱 가속화할 생각은 없는가?
글 : 이주연 (경인교육대학교 교수)
캔버스를 신중히 선택하려 한다. 거대한 화폭에 대상을 옮겨 놓았을 때 확장으로 인하여
박미연 작가는 2016년과 2018년에 내 컬럼에서 다룬 바 있다. 거칠게 깎인 면의 형태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화면에서 대상이 전하는 긴장감, 견고함은 나에게 있어
와 화사하고 영롱한 그리고 다분히 감각적인 색채가 서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시선 커다란 즐거움이다. 지금 현재는 붓자국의 미묘한 떨림과 화면에 응축된 그 긴장감이 좋
을 사로잡는다는 점에 있어서 이번 작품도 전작과 유사하다. 다음은 작가와의 대화이다. 다. 또한 필연적으로 화면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색과 표현으로 이루어지는 하모니를 온
전한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음을 만끽하고 싶다. 그러나 생각은 열어두겠다.
전작과 비교할 때 작업을 함에 있어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전작에서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색의 향연’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전작과 동질성을 유지 요즘 작업을 함에 있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되, 캔버스 크기 변화에 따른 화면 구성과 이미지의 변화를 꾀했다. 전작에서의 강렬한 작품 제작 초반에 대상에 대한 오감을 열고 기다리다가 포착되는 영감(inspiration)을 매
색의 노출은 그대로 유지하되, 대상에서 연상되는 주관적인 이미지들을 연결시키려 하였 개로 화면에 표현하는 순간의 그 첫 스텝이 작품 전체를 좌우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다. 특별히 색을 예로 들면 채도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로 표현을 시도하고 있는데, 쉽게 잘 가장 중요하다. 또한 작업 중반에는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유지하며 작품과 내가 적절한
어울리는 명도 차이에 따른 표현과 달리 채도는 색의 온도에 따른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이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 작업 후반에는 작품 속 대상과 분리하여 열정과 이성을 적절하게
러한 채도의 미묘한 변화에 집중하면서 화면에 깊이를 부여하려 하였다. 안배하는 것, 작품 제작 전 과정에서 작업에 대한 감정선과 표현의 자유로운 흐름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 마지막에 완성을 마주하게 될 때 그 순간을 결정하는 것이 가장 어렵지
작가에게는 색이 가장 중요하겠으나, 사과나 꽃과 같이 깎거나 뜯는 등 해체 만 가장 중요하다. 결국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매 순간들이 다 중요하다.
가 가능한 자연 소재가 아닌, 변형이 불가능한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작품의
작가에게 꽃이나 사과가 중요하기보다는 그곳에 꽃이 있었고 사과가 있어서 대상을 표현
소재로 고려해본 적이 있는가? 한 것으로 이해한 바 있는데, 오랜 시간 동안 작가 곁에 머물던 사과는 이제 작가에게 또
작품의 대상, 즉 소재는 다양할 수 있으나, 모든 대상이 작품을 위한 영감을 주지 않는다.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가 보다. 회화의 정통성을 간직한 평면을 사랑하고 색채를 다양하게
사과는 나에게 일반적인 대상이 아니다. 폴 세잔의 사과에서부터 출발한다. 가장 근원적, 실험하고 있는 작가에게 미래에는 지금의 사과처럼 무엇이 또 영감을 주는 소재로 등장하
원초적, 기본이 되는 동기로 인하여 사과는 나에게서 시작된다. 매 순간 사과를 똑같이 깎 게 될지 기대된다. 그러나 무엇을 그리건 중요하지 않았던, 대상과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지만, 작품에 표현되는 순간 나의 감성은 새로운 옷을 입는다. 내 작품에서는 대상에 생명 평면과 색채를 실험하던 당시의 작업 세계가 그립기도 하다.
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소극적인 해체를 선택한다. 색의 미묘한 떨림은 화면 속에서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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