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4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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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수토찬비문(平水土贊碑文) <허목(許穆)>
久旅忘家翼輔承帝(구여망가익보승제) 집을 떠난 지 오랫동안
임금의 뜻을 받들어서
勞心營知衰事與制(노심영지쇠사여제) 온갖 지혜 다 짜내
열심히 일하고 규범을 만들었더니
泰華之定池瀆其平(태화지정지독기평) 땅이 안정되고
물이 고요해져서
處水奔麓魚獸發形(처수분록어수발형) 물에도 땅에도
어수가 제 모습을 나타내니
而岡弗亨伸盃疏塞(이강불형신배소색) 형통하게 되었고
비색함이 없어져
明門與庭永食萬國(명문여정영식만국) 밝은 사회 이룩되어
영원토록 잘 살리라.
이 비문의 유래는 미수(眉叟) 허목(許穆) 형산비기(衡山碑記)에 의하면 조
선 효종 6년 을미(1655년) 선조의 여러 왕자 중 인흥군(仁興君)의 장남인 공
자(公子) 낭선군(朗善君)이 중국 연(燕)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형산신우비(衡
山神禹碑) 77자의 비문 탁본(拓本)을 얻었는데 그 글자의 형상이 마치 용이
나 뱀이 꿈틀거리는 것도 같고 새나 짐승이 움직이는 것도 같고 또는 초목의
형상과도 같이 빛나고 황홀하여 무어라 형언키 어려웠다 한다.
이 비문을 벌써 옛날 하후(夏后)씨가 이 글로서 치산치수(治山治水)를 함에
중묵(衆物)이 제압되어 없어지니 사람들이 안심하고 잘 살 수 있었다 한다.
이 비문이 4천년 동안이나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묻혀 있다가 중국 명나라
가정(嘉靖) 때 (1527년)에 비로소 처음으로 발견된 것을 낭선국(朗善君)이 우
리나라에 전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낭선군은 원래 고전(古篆)을 좋아하였
다고 한다.
삼척군청에서 간직하던 이 비문의 목판은 일제 시(1920년) 경성제국대학에
이송 보관하였으며 현재는 서울대학에 보관 중이다.
우전각은 1945년 5월에 헐어서 무너진 것을 1947년 12월에 이 지역 인사
김형국, 김진구, 김몽순 등의 주선으로 정라진 대동청년단이 주동하여 준공
하였으며, 1948년 5월에 이청천(李靑天)장군을 찾아가 우전각(禹篆閣) 3자의
서액을 받아 걸어 놓았다.
614 三陟金氏 宗史 總覽 修訂增補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