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 - e 수도노회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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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심미적 아름다움과 숭고한 아름다움 그것들의 균형’을 다루며 그것들의 대화를 추구하고자 합니다. 즉
예술(Art)과 사역(Ministry)의 대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예술가로서의 여정
본인이 만든 노래 중에 1990년에 발표한 ‘쉼’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어느 집회에서 이 노래를 들
은 어떤 형제가 내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노래의 마지막에 “그렇게 아름답게 날 위해 죽으신 참 사랑”
이란 구절이 있는데, 그 형제는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처참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무엇이 아름답
냐고, 그것을 아름답다고 한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당시 저는 거기에 대해 적절히 답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단지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사랑이 무엇보다도 가장 아
름답다 생각을 했지만 막상 설명을 하려고 하니 말문이 막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본인의 자전적인 고백이 담긴 노래였습니다. 무언가를 찾아 끝없이 방황했던 나의 삶의 여행이 완전하신
주님 안에 영혼의 닻을 내린다는 내용의 곡이었지요.
어릴 적부터 미술을 했던 저는 아름다움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늘 내가 원하는 실력과 성공한 예술가로서의
인정받는 위치에 도달하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청소년기에는 미술, 그리고 대학 이후 진로를 음악으로 바꾸고 난 후 부터 노래는 나의 표현과 소통의 방법이었습니
다. 청년기에는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 세상에 들려주어 감동을 주고 싶었습니다. 노래로 사람들의 마음에 일어나
는 변화를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게 저의 삶의 의미와 보람일 거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어느 날 주님을 믿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아름다움만이 아닌, 숭고하고도 영적인 세계의 아름다움을 체
험하게 된 때부터 저는 예술가로서 그동안의 제 노력의 모든 헛된 동기들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심미적인 아름
다움만을 좆았던 삶의 부질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위한 자기희생, 그분의 그 은혜의 행위가 가장 아름다운 것을 알고 난 후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아름다움을 향한 감각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저의 노래 가사에 의문을 가졌던 그 형제는 ‘아름다움이란 듣고 보기에 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심미적 관념
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눈에 보기에, 귀에 듣기에 좋은 심미적 아름다움.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들이지만, 그것이 美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들은 어쩌면 완전한 세계의 아름다움을 희미하게 보여
주는 그림자와도 같습니다.
심미적인 것만이 아닌 모든 창조세계 너머에는 근원적 아름다움이 있음을 성경은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손수 지으신 피조물 모두를 바라보시면서 “좋았더라.”
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을 지으신 여섯째 날에는 당신께서 지으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보시며 “심히 좋았더
라.”고 하시는 대목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피조세계가 죄로 오염된 이후 창조된 아름다움은 왜곡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로 주어진 창조성,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 인류의 창의력 또한 오염되고 만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과 단절되어 깨어진 세상 속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내려오신 성육신과 십자
가의 희생은 이 우주 안에서 그 왜곡된 창조성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