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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와 순종- ‘Beauty and Obedience’
하 덕 규 목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유다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
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
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출31:1-6)
“영적인 미와 예술적인 미는 서로 연합한다.”
들어가는 말
기독교 예술은 현대에 들어 분명 세상예술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 예술분야가 스스로를 교
회 내의 예술, 즉 예배용의 음악으로만 그 사역의 범위를 국한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뿌리 깊은 문화이원론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교회의 예술은 세상예술과 담을
쌓게 되고 교회 공동체의 예배 속의 예술로만 만족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과연 타당한 기독교예술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합니까? 교회가 지닌 사명을 뒷받침하는 기독교예술과 예술가들은 어떤 태도로 아름다움을 대하고 그
것을 다루면서 일해야 할까요?
아름다움과 사역의 대화를 시작하며
하나님은 완전한 미적 감각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아름다우신 상상력은 자연과 우주 안에 표현되어 있습니
다. 아름다움은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의 창조적 재능, 즉 예술가들의 창작품들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의 선물인 창조성은 죄로 인해 본래의 자리를 이탈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분리되어 탐미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
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속 예술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의 ‘전제’ (pre-Understanding)를 가져야 할 것은, 美, 즉 아름다움은 모든 예술의 근본적 측면이
라는 것과 또한 두 가지 측면에서 아름다움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조세계 속의 ‘심미적인 아름다
움’과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숭고한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피조 된 미’와 ‘근원적인 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자연에서 접하는 혹은 인간들의 작품에서 접하는 ‘심미적인 미’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
에 있는 ‘숭고한 미’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심미적인 미’ 그리고 ‘숭고한 미’ 그것은 둘 다 중요하며 교회사 가운데에도 그 둘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 위대한 결
과물들을 만들어내는 기독교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곤 했습니다.
‘숭고한 아름다움’이란 ‘영적인 美’, 즉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서 비롯됨을 말합니다. 신의 아름다움, 사랑이신 그
분의 본성에 기인하는 이 표현은, 우리 세계 속으로 나타나신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숭고함, 예수그리스도의 자
기희생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으로 인한 결과,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 안에 있는 창조성, 아름다움이 참
된 자리를 되찾는 것을 창조성의 회복이라고 하며, 그것을 통한 사역으로 세상의 문화를 바꾸어 가는 작업을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