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1 - 오산문화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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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VOL. 66 osan culture
아보자.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 김유정 일가가 현금과 토지 일부를 정리해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1백
문예에,「노다지」가 중외일보에 각각 당선됨으 여 칸짜리 살림집으로 이사 한 때가 1913년이다. 그런데 이사할 무렵
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봄봄」,「금 따는 콩밭」, 부터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갖은 약을 다 써도 일어나지 못하고 이
「동백꽃」,「따라지」등의 소설을 30편, 수필 12편, 듬해 숨을 거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
편지·일기 6편, 번역소설 2편을 남긴 작가다. 나자 김유정은 고아가 되었다. 실질적인 가장이 된 형 김유근이 술과
1996년까지 김유정 문학에 대한 연구 논문이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여파로 운니동의 집을 처분하고 관철동
무려 360편에 이르는데, 이렇게 쏟아지는 많은 으로 이사했다. 휘문고보(현 휘문고)를 나와 1929년 연희전문학교(현
연구 논문은 그의 문학사적 위치가 중요함을 연세대)에 갓 들어간 김유정은 남도창을 하는 박녹주에게 첫눈에 반
말해준다.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일본강점 해 프로포즈를 했지만 거절당한다. 이 일로 수업에 충실하지 못하여
기 때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작면 실레 마을(강 1930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그 후 김유정은 1931년 고향인 실
원도 춘성군 신동면 증리)에서 아버지 김춘식 레마을로 내려온다. 고향에 내려온 김유정은 요양에만 매달리지 않고
과 어머니 심씨 사이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틈틈이 장만한 나무로 야학당을 지어 글 모르는 이들을 모아 가르친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 무렵 나라 곳곳에서는 다. 이를 발전시켜 정식으로 간이학교 인가를 받아 금병의숙을 설립했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 위해 강요한 조 다. 1932년에는 충청도 지방의 금광을 비롯해 곳곳을 떠돌았다. 그는
약,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의한 일제의 군대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며 많은 것을 체험했다. 특히 짚으로 꼬아 만
해산령에 맞서 의병 부대가 들고일어난다. 김유 든 주머니 속에 술병을 넣어 들고 다니며 농부나 광부에게 술을 파는
정이 살던 실레마을도 국적토벌, 국모보수, 배 ‘들병이’들을 만난 일은 나중에 그의 창작 생활에 귀중한 자산이 되었
양척외의 기치를 내걸고 서울로 진격하는 춘천 다. 그러나 형의 음주벽과 가족에 대한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자 1933
의병진의 후방기지가 있던 곳이다(실제 이 지역 년부터는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조카, 형수와 함께 창신동, 신당동, 효
출신 의병장 유인석 등이 있음). 의병들은 일제 제동 등을 전전하며 셋방살이를 했다. 김유정은 이 무렵부터 소설 쓰
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소작농, 유랑민, 노동자, 기에 본격적으로 매달리는데, 1933년 1월 13일 「산골 나그네」를 끝낸
실업자들이 대부분이다. 어린 시절에 의병들과 데 이어 8월 6일에는「총각과 맹꽁이」를 썼다. 김유정은 밤마다 식은
맹꽁이, 만무방, 들병이, 금장이, 거지들의 모습
은 뒷날 김유정의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하고
생생한 하층 계급 인물을 창조하는 데 밑거름
이 되었다.
춘천스카이워크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는 답사팀, 사진 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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