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오산문화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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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이야기








           「독성산성(독산성)중수기」 - 사양재 강호보 『사양재집(췌언)』 권 23


           禿城山城重修記



           이 글은 사양재 강호보(1690-1778)가 64세인 1753년에 오산에 있는 독산성(옛 독성산성)을 중수할 때 부
           탁을 받고 대신 써준 중수 기록이다.


           <번역>

           이 독산성은 탄환의 조그만 귀와 같고 중국 5대10국중의 남한(南漢)과 북한(北漢)처럼 대치하고 서울 주
           위를 돌면서 우뚝솟아 호남과 영남을 끌어당기듯하고 왼편에는 관아가 있고 진성의 남쪽에는 오래전에 진
           남루라는 누각이 있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흙다리가 위태로워 가히 오를 수 없었다.
           내가 마땅히 떨어져나간 결핍한 것들을 받들어 이 슬픈 일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알렸는데 고칠 뜻이 있어

           마침내 무리 중의 중영장中營將인 김경유 1) 가 방략을 주었는데 그 일을 계획하여 김경유가 능히 곳집과 비
           들기 집들을 없애 재목을 얻어 옛 것을 새로 바꾸는데 몇 개월도 안 걸렸다.
           바꾼 것이 다시 새 것이 되었다. 그 재주는 뛰어났고 그 의지는 맡은 바 책임을 다하여 가히 가상하였다.
           일찍이 산성의 시설과 누각이 무너지고 세운 유래와 그 자취는 월사 이상국(이정귀) 2) 의 기문記文 3) 에 있는

           데 그는 어려서부터 만장萬丈의 불빛을 얻고 배움이 몇배씩 거듭쌓여 진실로 한문공(한나라 한유) 밑에서
           라도 그의 문장을 지을 수는 없다고 한다.
           하물며 내가 궁마 기술을 연마한다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에 등한하지 않았지만 감히 그의 말 뒤
           에 한 글이라도 섞을 수 있겠는가?


           1)  김경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군철(君哲), 호는 노은(老隱). 아버지는 공조참판 김지일(金之鎰)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로 참봉 강
             진(姜珒)의 딸. 초서와 문장에 뛰어났다.
              1762년(영조 38) 어영군기수보(禦營軍器修補)로 첫 출사한 이래 첨지중추부사 겸 순장, 1765년 용호영군기수보(龍虎營軍器修補)·
             동지중추부사·오위장 등을 역임하였다. 1772년 조관으로서 70세에 이르러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받았다. 저서로는 『노은
             유고』가 있다. 문집에 「禿城漫吟」과 「鎭南樓漫吟」, 「진남루중수후음성鎭南樓重修後吟成」 시가 있으며  ‘사물을 알게 되면 기다림이 있
             다. 용마루가 다시 하늘에 날고 세월이 마땅히 다시 회갑이 돌아오면 사람이 다시 공사를 하여 규모는 과거 제도를 존중히 하고 울굿
             불긋 헤진 것은 새것으로 바꾸면 앞뒤의 갈고 닦는 뜻을 잇게 되면 굳이 너와 같이 반려자가 아니겠는가? (누각은 기해년(1599)에 창
             건되었고 병진년(1676)에 중수되었고 또 지금 계유년(1753)년에 다시 개축하였는데 그 사이 햇수가 78년이니 대비하여 기다리는 것
             이다) 또  「등진남루登鎭南樓」에서 ‘(누각 위에는 월사 이정귀의 기문이 걸었고 변응성(1552-1616, 경기방어사, 이천부사)가 진성 누
             각을 세우고 세월이 오래되어 비비람에 기울어져 곳집과 비들기 우리를 헐어 자재를 모아 누각을 개축한 고로 말한다) 진남루에 올
             라 앉으니 바람은 따스하고 비는 비로서 개이고 이미 모래가 된 월사의 문장이 있고 변응성이 창건한 것이 남았으니 비비고 만지면
             만감이 더해지고 부끄러운 재주를 거듭 기우니 국가의 방위를 다시 위함이 되고 일찍이 제도를 튼튼히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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