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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이야기
월사 이정귀 『월사집』 제37권 「진남루기(鎭南樓記)」
기읍(畿邑) 37개 중에서 가장 큰 곳이 수원(水原)이다. 가장 큰 고을이기 때문에 부사(府使)의 자리에는
중망을 지닌 사람을 선발하며, 3도호(都護), 2군(郡), 7현(縣)을 예하(隷下)에 두어 한남(漢南)의 큰 진(鎭)
이 된다.
이 고을은 평원의 드넓은 들판 가운데 자리하여 험준한 산과 계곡이 없고 치소(治所) 동쪽 10리쯤 되는 거
리에 높은 산이 길가에 불쑥 솟아 있으니, 사람들은 독성산(禿城山)이라 한다. 산에 수목이 없어 멀리서
바라보면 대머리와 같은데, 산의 이름은 이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저 범상하게 보고 특이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임진(1592)년에 일본이 대대적인 병력으
로 우리나라를 유린하여 튼튼한 성과 큰 보루들이 연이어 함락되었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잔병
(殘兵)을 거느리고 싸우다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서울의 왜적에게 저항하였는데, 적이 병력을 풀어서 누
차 위협하였으나 끝내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이 성이 좋은 형세를 차지하여 나라의 요충
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듬해 적이 퇴각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있자, 조정에서는 이곳의 산성을 보수하여 적을 막을 계책을 서둘
러 강구하였다. 주상께서 먼저 독성(禿城)에 관해 물으셨고 서애(西厓) 유상국(柳相國 유성룡(柳成龍))과
서경(西坰) 유관찰(柳觀察 유근(柳根))이 실로 이 계책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방어사(防禦使)와
변후(邊侯) 1) 에게 명하여 이 성을 순시하게 하는 한편, 면포(綿布) 수백 필을 하사하여 편의를 보아주었다.
변후가 사수(射手)로 쓸 군민(軍民)을 모집, 장정 5백 명을 뽑아 주상의 명으로 상을 내리고 진졸(陣卒)로
삼는 한편, 그 사실을 상주(上奏)하면서 이 성은 지켜야 할 곳이라는 것을 극언(極言)하였다. 이에 주상께
서 수긍하시고 드디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일을 착수토록 하셨으니, 비록 크게 일을 벌이지는 않았으나
1) 변후: 변응성 (1552~1616)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기중(機仲). 아버지는 공조판서 겸 도총관 변협(邊恊)이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였고, 강계부사를 역임한 끝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물러가 있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먼저 경주를 점령하여 부임하지 못하고, 이듬해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경기방어사가 되었다. 이천부사(利川府使
)가 되어서는 여주목사 원호(元豪)와 협력하여 남한강에서 적을 무찔렀다. 1594년 광주·이천·양주의 산간에 출몰하는 토적(土賊)
을 토벌하였으며, 한강 상류 용진(龍津)에 승군을 동원하여 목책(木柵)을 구축하여 병졸을 훈련하였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용진과 여주 파사성(婆娑城)을 수비하였다. 광해군 때에 훈련대장과 판윤에까지 승진
하였다. 1612년(광해군 4) 박응서(朴應犀)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혜(
襄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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