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 - 오산문화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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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VOL. 67 osan culture
이 성은 이때 처음 만들어졌던 것이다.
정유년(1597, 선조30)의 난리 때 적이 이
고을의 경계까지 쳐들어왔으나, 백성들
이 이 성에 들어가 지키면서 든든히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이 성을 지키
는 이가 혹 적임자가 못 되어 군병의 마
음과 성의 무비(武備)가 날로 해이해지고
무너져 갔다. 고(故) 상국(相國) 해원 윤
공(海原尹公 윤두수(尹斗壽))이 임종 때
올린 유표(遺表)에서 독성(禿城)과 폐부
(廢府)를 보수하고 영변(寧邊)과 경성(鏡
누각이 있던 남문과 주위 경관
城)의 제도처럼 수신(帥臣)을 보내어 방
어사(防禦使)로 삼아 겸임토록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 문제를 조정에 하달하니, 모두 타당하다고 여겼
다. 그리하여 본주(本州)의 도성을 지키러 올라오는 육군과 경창(京倉)에 운송되어 들어가는 전세(田稅)를
면제하여 모두 이 성에 소속시켜 병력과 군량으로 삼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위풍을
갖추고 실무에 익숙한 사람을 선발하여 수비하게 하였는데, 변후(邊侯)가 재차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
변후는 부임하자 곧 그 성을 쌓아서 높게 하고 그 해자를 파서 깊게 하고 샘을 파서 백성들이 목마르지 않
게 하고 밭을 일구어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였으며, 궁노(弓弩)ㆍ석거(石車)ㆍ포화(砲火)ㆍ기계(器械) 등을
널리 설치하였다. 그리고 한가할 때면 날마다 군병들과 함께 공격과 방어에 대한 준비와 말타기, 활쏘기, 칼
과 창 쓰기 등의 기예를 늘 적과 대치하고 있는 것처럼 훈련하여 모두 실전에 쓰일 수 있도록 하였다. 한 해
가 지나자 성안에 거주하는 백성이 2백 호(戶)를 넘었으며, 사찰과 관청도 도합 백여 곳이나 되었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조정에서 근신(近臣)을 파견하여 호궤(犒饋)하여 군병들을 위로하고 그 기예를 시험
해 보도록 하였다. 이에 주상께서 기뻐하여 사졸들에게 포상을 내림에 차등을 두는 한편 변후에게는 특별
히 태복마(太僕馬)를 하사하고 따뜻한 말씀으로 위유(慰諭)하여 장려하셨다. 그러자 군병들의 마음이 서
로 기뻐하고 대중의 마음이 크게 견고해져, 잘 정비된 성벽에 기치가 면모를 일신하여 우뚝이 기보(畿輔)
의 큰 관문이 되었으니, 아, 그 노력이 컸도다.
변후가 성의 남쪽 모퉁이 깎아지른 벼랑, 깊은 골짜기 위에 초루(譙樓)를 세워 나그네들이 모이는 곳으로
삼았는데, 제법 넓고 전망이 틔어 좋았다. 진남루(鎭南樓)라 명명하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청
하기에 이 성이 세워진 전말을 적어서 주노라.
만력(萬曆) 31년 계묘(1603, 선조36) 계추(季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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