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5 - 오산문화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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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VOL. 67 osan culture
단지 진남루 누각은 1599년(만력
기해년)에 세워졌고 또 무릇 78년
후인 1676년(숭정후 병진년)에 중
수되었고 또 78년후인 지금 1753년
(계유년, 사양재 강호보 64세) 다
시 중수된 것이 기이할 뿐이다. 78
년후에 마땅히 한번씩 중수하는
것이 이 누각의 옛 이야기다. 이후
에는 몇번 중수될 것인지는 알 수
가 없다.
매양 78년 기간이 되어 바꾼다면
이 성은 누각과 더불어 우리 조정
에 빛나고 억만년까지 끝없이 갈
것이다. 이것을 기록하여 후대에게
「독성산성중수기」 - 사양재 강호보 『사양재집(췌언)』 권 23
알린다.
2) 월사 : 이정귀李廷龜 :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세조 때의 명신인 이석형(李石亨)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현령 이계(李啓)이고, 어머니는 김표(金彪)의 딸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문장으로 이름 높던 가문에서 출생해 가문 내에서의 가르침을 통해 성장하였다. 유년시절부터 남다른
문학적 자질을 보이기 시작해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차운(次韻)했다고 전한다.
1577(선조 10) 14세 때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을 하며 명성을 떨치기 시작해 1585년(선조 18) 22세에 진사, 5년 뒤인 1590년(선조
23)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設書)가 됐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
나 『대학』을 강론해 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후에 『대학강어(大學講語)』로 간행됐다.
중국어에 능하여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을 접대할 때에 조선 조정을 대표하며 중요한 외교적 활약을 했다.
1598년(선조 31)에 명나라의 병부주사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
을 일으켰다. 이정귀는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주장이 아무런 근거
가 없음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1601년(선조 34) 34세 때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귀국한 뒤에 대제학에 올랐다. 1604년(선조 37) 세자책봉주청사
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했다.
중국문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100여 장(章)의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그의 능력이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조판서·예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 등 조정의 중요한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3) 월사 이정귀의 『월사집』 제37권 「진남루기(鎭南樓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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