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 - 오산문화 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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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VOL. 59 osan culture
인 영혜옹주와는 너무 짧은 삶이었다. 어릴 적 마 을사람들은 그 집을 궐집 또는 궁집으로 불렀다. 그 집은
을의 전설처럼 내려오던 동탄면 금곡리(현 오산 1957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대문은 솟을 대문으로
대한문을 본떴는데, 크기는 대한문의 3분지 2였다니 대단
시 은계동)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박영효에
히 웅장하고 컸었다. 별장은 정원을 곁들였는데, 2천여평
대한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
이 넘었다고 한다. 박영효는 중국인을 고용하여 앞 텃밭에
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박영효는 흰말을 타고 다
토마토를 재배하였다. 그의 기침소리는 온 마을을 쩌렁쩌
녔고, 오산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도 박영효가 손
렁 울리게 하였고, 걸음걸이도 양반으로 위풍당당하였다.
을 들어 멈추게도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오산3·1만세운동 때에도 이 마을에는 왜인 순사들이 얼씬
이 당시에 그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가를 유 도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오산3·1만세운동에 가담했던
추할 수 있겠다. 박영효가 말년에 살았다는 박영 마을사람들도 모두 무사했다 한다. 지금 천태종 황덕사가
있는 곳에 마굿간이 있었는데, 한 번에 대여섯 필을 수용할
효별장은 버려진 공터로 남아 있다가 유림각호
수 있는 규모였다.
텔 터와 함께 현재는 다세대 주택을 짓고 있다.
그가 말년에 낙향하여 직접 마을사람들의 노동력을 이용
2002년도에 필자는 그의 행적과 그의 별장에 대
하여 집 안팎일을 보살폈는데 품삯은 후했다고 한다. 별장
해 조사한바가 있다. 당시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은 아름다웠는데 청단풍나무(이 당시는 아주 귀한 나무였
채록하여 정리한 내용을 적은 조사서를 인용해본 다고 한다)가 있었고, 그 나무를 중심으로 로타리를 만들었
다. 다.
“2002년 10월 17일 오후 2시 반경 박영효가 살았다는 그의 울타리는 구기자나무와 산수유나무를 심었다. 박영효가 그
별장 터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곳에 가보니 그의 별장이 곳에 머물 때는 뒷산에서 일본순사가 보초를 설 때도 종종
있던 자리에는 무, 배추밭으로 가을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 있었다. 뒷산 너머에 그의 과수원이 있었는데 마을사람들
쬐고 있었다. 지금은 그곳이 오산시 은계동 64번지이지만 이 박영효의 과수원이 있던 그 곳을 박동이라고 불렀다. 지
은계동이 오산시로 편입되기 이전에는 동탄면 금곡리였다. 금은 한호빌라가 있는 뒷산과 상수도 물탱크가 있는 자리
별장은 양철지붕으로 된 단층이었고, 방이 네 개였는데 마 로 과수원 면적은 상당히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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