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7 - 오산문화 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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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VOL. 59 osan culture
Osan CuLture News
이화정 오산연극협회 지부장은 “빠른 시일 내 된 자료를 틈틈이 찾아보았다. ‘재인청’은 지금
에 오산 부산동이 예능의 본거지로 무속인들의 의 예술인 협회라 볼 수 있다. 그곳에 화랭이 출
교방 역할을 했다는 것을 연극으로 살려내어 그 신의 이종하선생님이 도대방을 지내며 살았던
시대 예인들의 생활을 표현하고자 한다”며 “이 곳이고 12대 대를 이어 내려온 아들 이용우선생
용우는 굿판에 흥을 돗구는 화랭이였다는 것을 님이 오산에 살았다. 무당의 굿 무브먼트는 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굿은 잡귀를 쫓는 국연극 역사의 모티브라 할 수 있는데 생가 터
것이지만 화랭이는 창과 노래를 하며 진행시키 앞에서 많은 예인들이 대문을 매일 넘나들면서
는 점이 굿과 다른 점이다. 그는 어린시절 계모 북적였던 앞마당의 풍경이 말해주는 것을 통해
를 따라다니며 배웠던 판소리를 몸에 익히고 절 연극인으로서의 자세를 바로 세우게 되었다.
에 들어가서 배웠던 글을 토대로 서사적인 내용
을 만들어 마을굿을 할 때 이야기를 입혀 굿을 확 트인 들판의 논두렁을 따라 당집으로 올라가
만드는 자질을 키웠다”고 했다. 면서 이용우 선생님이 마을 굿을 하면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을 그 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수
예인 이용우를 오산에서 살려내 이 시대에 전 원의 변두리 지역인 오산의 부산리에서 예인들
통예술의 발전을 위해 함께 가고자하는 것은 이 의 기량을 연마시키는 것을 보람으로 삼고 자신
용우는 그대로 단순히 무가 전승에만 그친 것이 의 예술혼을 굿으로 승화시켰을 것이다.
아니었기 때문이다. 굿의 내용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고 독창적으로 변형시켰다는 점이 다르다. 그분이 화랭이의 자격으로 굿판에서 멸시와 천
이 점에서 이용우가 가진 예술적인 역량을 가늠 대의 눈초리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실력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용우의 삶에서 전통예술을 으로 전통예술의 경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 이
만나는 기쁨을 발견해 이 시대에 필요한 예술적 외는 없었으리라.
가치를 찾고자 함이다. 오산 부산리에서 경기지역 재인청 관련된 예인
연극인 강일순씨는 “연극하는 사람으로부터 ‘재 들을 호령했을 이용우 선생님이 연극인인 우리
인청을 연극으로 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질의를 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분명 있었다.”며 200년이
받았었다. 부산동에 재인청 관련된 분이 살았었 넘어 암· 수가 나란히 서 있는 부산동 왕 버드
다니. 실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산과 부 나무 서낭에 과자를 올려놓고 돌아서는데 코끝
산리가 강하게 머리에 남은 뒤로 재인청에 관련 이 찡해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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