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2 - 제4권
P. 512

(炙肉)은 헌작(獻酌) 때 올리기도 한다. 변복취위 단계에서는 참여자들이 제복을 입고 각 위치에 정렬
                  한다. 출주 단계에서는 사당에서 신주(神主)를 내어놓고, 신주가 없을 때는 지방(紙榜)을 써 붙인다.

                    본 과정을 보면, 신주의 경우에 신주에 조상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해 참신(參神)을 한 후 강신을 하
                  지만 지방의 경우에 신주가 없다고 생각해 먼저 강신을 한 후 참신을 한다. 헌작 단계에서는 세 번에

                  걸쳐 술과 일종의 안주인 적을 올린다. 보통 주인이 초헌, 주부나 동생이 아헌, 장자나 장남이나 친척
                  이나 빈객 또는 제부(弟婦)가 종헌을 맡는다. 첫잔을 올린 후 축관은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연유를

                                                         13)
                  고하고 제수를 권하는 내용의 축문을 읽는다.  유식·합문·계문·진숙수 단계에서는 조상에게 음
                                                                                    14)
                  식을 권한 후 식사하는 동안 문을 닫고 밖에 있다가 식사 후 문을 열고 들어가  입가심을 위한 숭늉
                  을 올린다. 사신 단계에서는 제사음식을 흠향한 조상에게 하직인사의 의미로 지방을 불사른다.
                    마무리 과정을 보면, 철상·음복 단계에서는 상을 치운 후 조상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조상의 덕을

                  잇겠다는 의미를 담아 음식을 나눠 먹는다. 음복은 『주자가례』의 수조(受胙 : 제사에 쓴 고기)와 준의
                  절차를 대신한 것이다. 제사음식은 제사에 불참한 친족과 이웃에게까지 나눔으로써, 혈족 및 이웃과

                  화합하는 매개물이 되기도 하다.
                    이상의 제례 절차는 조상이 생전에 실제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띤다. 이러한 모습은 돌아가신 조상

                  이라도 그 기운을 자손이 느낄 수 있다는 감통지리(感通之理)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제례는 유교의
                  사생관을 확인하면서 자손이 조상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효의 형식을 표현하는 현상이다.






                  제2절    오산화성궐리사


                    오산화성궐리사(闕里祠)는 조선 제11대 왕(재위 1506-1544)인 중종 때 문신이자 공자의 64대 손

                                            15)
                  인 공서린(孔瑞麟, 1483-1541) 이 서재를 세워 후학을 가르치던 곳에 제22대 왕인 정조(재위 1776-
                                                       16)
                  1800)의 전교를 받아 설립된 공자 사당이다.  오산시의 대표적인 사당으로, 충남 논산의 노성(魯城)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궐리사로 꼽힌다. 현재 위치는 경기도 오산시 매홀로 3번지(궐1동 147)
                  이다. 1994년 4월 20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13)  축관을 별도로 두는 것은 주인이 감격과 슬픈 심정 때문에 조상에게 제사의 뜻을 다 표하지 못할 수 있고, 참례자에게 함께 지내는 의
                     의를 알리는 알리기 위한 방법이다.
      오산시사
                  14)  합문에서 계문까지의 시간을 아홉 숟갈의 밥을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이라는 의미로 대체로 구식경(九食頃)이라고 한다. 축관이 세
                     번 기침을 해서 계문 시점을 알린다.
                  15)  공서린의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희성(希聖)·응성(應聖), 호는 휴암(休巖). 공숙(孔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제로(孔悌老), 아버

      제              지는 공의달(孔義達), 어머니는 박원인(朴元仁)의 딸이다. 1507년 생원이 되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좌랑에 이어, 1511
      4              년 사간원정언을 거쳐 홍문관부수찬·수찬·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다. 이어, 1516년 장령, 1517년 시강관(侍講官) 등을 거쳐 승지가 되
      권              었다. 사헌부의 탄핵으로 물러난 후 1519년 좌승지로 서용되었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 인물과 투옥되었다가 풀려났
                     다. 1524년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뒤 파주목사·황해도관찰사·대사헌·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서린 항목.

    510           16)  오산시,   오산시사 (하)  , 1998, 382쪽(  증보문헌비고   권 210, 학교고, 각도 사원편[‘水原闕里祠正祖壬子建, 御書賜額’]; 유도회 오산지
                     부 연혁).
   507   508   509   510   511   512   513   514   515   516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