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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봉수기비(聖像奉竪記碑)가 있다. 공부자 석상 좌우에는 안자·증자·자사·맹자의 사현의 석상
이 있다. 성상전 옆 바깥에는 인성학당을 두어, 궐리사 사무실과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산화성궐리사의 역사는 조선후기인 정조16년(1792)에 공자의 영상을 봉안해 영당(影堂)겸 사당
을 건립한 데에서 시작된다. 정조는, 비록 정조15년(1791)에 니성(尼城: 魯城)의 궐리사에 부정적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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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전교를 내린 바 있지만, 정조16년(1972) 8월과 9월에 공자의 후손을 우대해야 한다고 하여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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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린(孔瑞麟)에게 문헌공(文獻公) 시호와 함께 궐리사의 편액을 내린다.
편액을 내린 경위를 보면, 정조는 1792년 읍지를 통해 공씨(孔氏)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수원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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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실을 알고 관찰사(道臣)에게 그 형태를 그려 올리게 해 궐리사라는 사우와 은행나무와 공서
린의 후손들과 궐리(闕里) 근방에 영당이 있었다는 점을 확인한다. 이어, 공서린에게 문헌공 시호를
내리고, 조정이 공씨 집안을 우대하는 일을 보통 예와 달리해야 한다고 하면서 도백(道伯, 관찰사)에
게 궐리 옛터에 집 한 채를 세워 내각에 있는 성상(聖像)과 영당에 모셨던 진영을 봉안해 궐리사 편액
을 내릴 것이라는 점과, 봄·가을로 지방 수령에게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모시게 하고 제수
(祭需)들을 충남 논산의 니성 궐리사의 예대로 하되 정갈하고 간략하게 하라고 전교한다. 또한 서원
을 지키는 재생(齋生)도 그 마을에 대대로 살아온 공씨로 하고 다른 유생이 섞이지 못하게 해 시비가
없게 하라고 전교한다. 20)
전교 이후, 정조17년(1793)에 궐리사가 완공되고 관련 제도가 갖추어진다. 구체적으로, 5월에 궐
리사가 완공되자, 비변사의 계획대로 진휼청(賑恤廳) 창고에 유치된 돈 2천 민(緡)을 보내 사우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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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비용을 갚게 한다. 6월에는 이문원(摛文院) 에 보관한 공자의 영정[眞本]을 화성 궐리사로 옮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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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7월에는 술잔을 포함한 제품(祭品), 폐백, 축문, 향 등에 관한 규정을 정하고, 대대로 그곳에 사
는 공씨가 헌작(獻酌과 축문을 읽고 집사를 맡고, 사당을 지키거나 사당 일을 맡게 하고, 매해 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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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마지막 달 상정일(上丁日)에 향사를 설행하게 한다. 9월에는 벼슬 유무와 무관하게 공씨가 공자
제사를 주관하게 하되 지방관이나 판관(判官)이 초헌을 하고 공씨가 아헌과 종헌을 하도록 규정을 정
17) 정조실록 32권(정조15년 6월 5일 무신 1번 째 기사). 당시 정조는 전국 360군데의 군현에 공부자를 제사지내는 곳이 있는데, 유독 니
성(尼城: 魯城)에서만 향교 이외에 별도로 한 사당을 설치하는 것, 즉 니성의 궐리사(闕里祠)도 완전히 옳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전교한다.
18) 정조실록 35권(정조16년 8월 21일 정해 1번 째 기사; 정조16년 9월 29일 을축 3번 째 기사).
오산시사 19) 정조실록 35권(정조16년 9월 2일 무술 1번 째 기사). 당시 정조의 전교에 따르면, 공자의 후손 중에 우리나라로 건너온 자가 수원의
중규면(中逵面) 구정촌(九井村)에 살았고 그곳에 성인의 묘우(廟宇)가 있으며, 고 대사헌 공서린(孔瑞麟)이 그 중에 가장 벼슬이 높고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 후손들은 지금 용인에 있는 도헌(都憲)의 무덤 아래로 이사해 살고 있다. 묘터[廟址]와 집터[家垈]는 아직
수원에 남아 있다. 정조는 관찰사[道臣]에게 각별히 편비를 보내 그곳의 형지(形址)를 도면으로 그려 올리게 하라고 한다.
제 20) 정조실록 36권(정조16년 10월 3일 무진 2번 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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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21) 정조실록 37권(정조17년 5월 12일 계묘 4번 째 기사).
22) 이문원은 조선시대 때 어진(御眞)·어제(御製)·어필(御筆)·선원보첩(璿源譜牒: 조선 왕실과 그 일족의 족보 책)·내부서적(內府書籍)
등의 보관을 맡던 관청이다.
23) 정조실록 37권(정조17년 6월 24일 을유 6번 째 기사).
512 24) 정조실록 38권(정조17년 7월 24일 을묘 2번 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