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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을 담은 장계(狀啓)를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 명종4년(1549) 7월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                                    517
                  한 주세붕(朱世鵬, 1536~1584)이 고적(古蹟)을 탐방하다가 수양산(首陽山) 등성이에서 황량한 사당                                      문화

                  을 발견하고, 1550년(명종 5)에 향교 서쪽으로 사당을 옮긴 후, 그 아래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세워                                     · 예술
                  제생(諸生)의 학업을 위해 소장하던 서책을 두고, 전민(田民)을 마련하고 주방과 창고를 세운다. 그

                                                               41)
                  후 명종10년(1555) 2월에 명종은 임고서원(臨皐書院) 의 예대로 편액(扁額)과 서적(書籍) 등을 내리                                     · 체육
                  라고 전교한다.     42)                                                                                 /  교육

                    다만, 명종10년(1555)에 내린 편액에 따르면, 당시 서원 명칭은 ‘문헌서원’이 아닌 ‘수양서원’이다.                                    /  종교
                  수양서원이 언제 ‘문헌서원’으로 개칭되었는지, 두 가지 명칭으로 불렸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와 관

                                                                                               43)
                  련해, 명종21년(1566) 6월 자료를 보면,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백운동서원[紹修書院] 을 세웠
                  고,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 문헌공 최충을 위해 해주(海州)에 문헌당(文獻堂)이라는 서원을 세웠는데

                  규모가 백운동 서원과 같았고 원근의 학자들이 많이 취학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44)
                    이후 선조5년(1571)에는 황해도 관찰사 박승임과 해주목사 한성원이 문헌서원을 해주 석동 백운봉

                  아래로 옮겨 세운 바 있다. 현종14년(1673)에는 신임 황해도 관찰사 윤곡(尹谷)이 조정의 허락을 받아
                  문헌서원을 중수한 바 있고, 그 후 신임 황해도 관찰사마다 경비를 보조해 문헌서원을 수리하게 한

                  다. 45)
                    그러다가 흥선대원군(1820-1898) 당시, 고종7년(1870)부터 고종8년(1871)까지 지속된 서원 철폐령

                  에 따라 문헌서원은 철폐된다. 비록 고종30년(1893) 3월에 팔도(八道)의 유생 김철선(金喆善) 등이 상
                  소를 올려 문헌공 최충의 서원을 다시 세울 것을 청하지만, 이미 철폐했다가 도로 세우는 것이 번거

                                                46)
                  롭다는 이유로 허락을 받지 못한다.  그렇지만 1909년 정월에 최충의 공훈과 업적을 기려 묘지를 수
                  리하고 지방관에게 술잔을 올리라는 고종의 전교가 내려진다.                    47)

                    한편, 남북 분단 이후 해주 최씨 대종회는 황해도 해주의 문헌서원을 그리워하다가 1985년 ‘문헌공
                  탄신 1,000주년’을 기념해 문헌서원 건립 계획을 구체화한다. 그리고 32세손 최원식(崔元植) 전 대종

                  회장이 서원건립추진위원장을 겸임해 당시 오산시 내삼미동 753-2에 부지를 마련하고 약 3년에 걸
                  쳐 건립에 착수한다. 그러다가 1991년에 문헌공 최충과 두 아들의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과 서원을 건

                  립해 매년 4월마다 제례를 지내면서, 오산의 문헌서원은 해주 최씨의 총본산이 된다. 그렇지만 이 지





                  40)   중종실록   35권(중종14년 1월 6일 신축 2번 째 기사).
                  41)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있는 서원으로 고려후기의 유학자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553년(명종
                     8)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창건하였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3년(선조 36)에 중건하였다.
                  42)     명종실록   9권(명종4년 7월 2일 기사 2번 째 기사) /   명종실록   18권(명종10년 2월 25일 경인 3번 째 기사). 한편,   명종실록   17권(명
                     종9년 7월 2일 경자 3번 째 기사)에 따르면, 주세붕은 풍기군(豊基郡)에서 안유(安裕)의 옛터를 발견해 서원(書院)을 세워 제사지내고
                     학문을 읽히도록 했고, 해주(海州)에도 서원을 세워 최충(崔沖)을 제사지냈는데, 제도는 풍기의 서원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43)  소수서원은 중종37년에 주세붕이 안향(安珦)의 사우(祠宇)를 세워 선비의 공부 장소로 삼았다. 그 후 이퇴계의 건의에 따라 명종5년에
                     소수서원으로 사액(賜額)되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44)   명종실록   33권(명종21년 6월 15일 갑술 1번 째 기사.
                  45) 오산시,   오산시사 (하)  , 1998, 398-404쪽.
                  46)   고종실록   30권(고종30년 3월 10일 임진 3번 째 기사).
                  47) 문헌서원 내 해동공자 문헌공 최충 동상 뒤편의 <문헌서원의 유래> 참조(확인: 2019.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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