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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이 2,000년대에 오산세교택지개발사업지구로 편입되면서, 영정각 중심의 공간만 남고 잔여 부지
는 시민을 위한 ‘문헌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48)
문헌서원이 오산에 있는 이유는, 비록 강원도 홍천의 노동서원(魯東書院)과 전남 강진의 명곡서원
49)
(明谷書院) 등에서도 최충을 모시지만, 해주 최씨와 오산 내삼미동의 인연 때문이다. 오산시와 가까
운 천안 성환에 최충의 비문이 새겨진 국보 제7호 사적비 봉선홍경사 갈기비(奉先弘慶寺 碣記碑)가
있지만, 무엇보다 문헌서원 일대는 최충의 14대 손이자 최만리(崔萬理, ?-1445)의 증손인 최선(崔璿)
과 최속(崔涑) 등의 묘소가 있는 해주 최씨 묘역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오산에 문헌서원을 건립하게
된다.
문헌서원에서는 전국 종친이 운집한 가운데 매년 4월 넷째 토요일 9시부터 향사를 진행한다. 향사
의 주요 내용은 9시부터 진행되는 시조 영단제, 11시부터 진행되는 문헌공·문화공·섭상서령공에
50)
대한 향사, 그리고 이어지는 해주최씨대종회의 정기총회이다. 문헌서원과 관련해 2017년에는 문헌
51)
서원을 활용한 문화콘텐츠의 개발 필요성이 대두된 바 있어,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제4절 경기도유도회 오산지부와 화성궐리사지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30일부터 6일 동안 서울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에서 전국 유림 천여 명이
참집한 전국유림대회가 개최되면서 전국 단위의 성균관유도회가 시작된다. 당시 대회에서 성균관대
학 설치와 이를 위한 재단 구성 등의 결의에 이어, 1946년에는 1월의 전국유림통일대회와 2월의 유도
회 간부회의를 거쳐 3월에 전국 유림 2,500여명이 성균관 명륜당에서 유도회 창립총회(전국유림대
표자대회)를 개최해 유도회총본부(위원장 : 金昌淑, 1879〜1962)를 조직한다.
1946년 유도회 창립총회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1956년 2월에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 인가
가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유도회총본부는 내부 갈등을 겪다가 1961년 군사정권의 포고령 제6호로 해
체된다. 이어, 1963년에 <사립학교법>에 의거해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교와 재단법인 성균관의 분리
가 이루어진다. 그 후 1964년 5월의 전국 향교 대표자대회에서 유도회 분규 종식과 재건에 뜻을 모으
고, 유도회 수습위원회를 조직해 1970년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유도회총본부(위원장 : 李家源)를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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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성균관유도회총본부는 성균관로에 위치한 유림회관에 있고, ‘총본부-
오산시사
48) <문헌서원 영정각> 안내문
49)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도 유림의 공의로 가정 이곡(李穀, 1298-1351)과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제 위해 1594년(선조 27)에 창건한 문헌서원이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4
권 전 문헌서원 항목).
50) 해주최씨대종회(http://www.haejuchoi.or.kr/, 문중의 역사→ 문화유적지. 2019. 7. 9.)
51) 「최충 선생과 문헌서원의 교육사상을 오산시에서 계승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3회 문헌공 최충포럼...문헌서원 활용한 문화콘텐츠 개
발 필요 대두」, 오산시민신문 , 2017. 07. 20.
518 52) 성균관유도회총본부(http://www.skkca.or.kr/, 2019. 7.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