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6 - 오산문화총서 3집
P. 56
고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추정에 그치고 있다. 48)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오산지역은 한강유역의 지배권에 따라 그 지배국도 여러 번 바뀌었
다. 이 지역은 한성기 백제의 영역이었으며, 이것은 『삼국사기』 온조왕13(B.C. 6)조에 영역이 북
으로는 패하(浿河: 예성강)에서 남으로는 웅천(熊川: 안성천)에 이르렀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475년(개로왕 21)에 고구려 장수왕이 중국의 남북조와 교류하면서 남진정책(南進政
策)을 강행하여 천안~온양~아산 선까지 공취함으로써 오산지역은 자연히 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이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후 551년(성왕 29) 나제동맹으로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친
백제 성왕에게 오산지역을 빼앗기고 만다.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트리고 553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지역의 6군(수원·용인·진위·이
천·평택·안성)을 탈취한 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이 지역도 신라의 지배하에 들
49)
어가게 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어 통치하였고, 당시 오산지
역은 한산주(漢山州)에 속한 수성군(水城郡)이 되었다. 한산주는 757년(경덕왕 16) 주군의 명칭
을 중국식으로 바꾸면서 한주(漢州)로 개명했다.
고려시대 오산지역은 태조 왕건이 남방정벌시 수원·오산지역 사람인 김칠·최승규 등이 자
신들의 휘하 군사200여명과 함께 왕건에게 귀순하여, 그 공로로 940년(태조 23)에 전국의 주
(州)·부(府)·군(郡)·현(縣)으로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오산지역을 수주(水州)로 승격시켰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983년(성종 2)의 12목 설치 때는 양주(楊州)가 목(牧)으로 승격되면서 수주도 관할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중앙의 지방통제체제는 995년(성종 14)에 크게 개편되어, 수주는 10도 중 관
내도(關內道)구역에 속하게 되었으며 도단련사(都團練使)가 파견되었으나, 1005년(목종 8)에
혁파되었다. 이어 1018년(현종 9) 다시 수주로 승격되어 지수주사(知水州事)로 회복되었다. 오
산시가 위치한 진위현은 고려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존속됐는데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고 뒤에 올려서 현령관(縣令官)으로 하였으며, 이로 미루어 진위현은 수원
의 남쪽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로서 비교적 중시되었다. 그리고 수주지방의 지명으로서 고려
사에 보이는 정곡촌(廷谷村)도 오산지역과 밀접한 지역의 명칭으로 여겨진다. 50)
1271년(원종 12)에 몽고병이 대부도에 침입하였을 때 대부도민이 이에 항거하여 몽고병을 살
48) 이병도, 1976,『한국고대사연구』.
49)『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第4 聖王 28年, 31年.
50) 오산시사편찬위원회, 1998,『烏山市史』上.
54 한신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고고학실습팀